어김없이 돌아오는
5월. 그리고 5월의 광주. 더이상 대학의 5월에선, 5.18을 느낄 수 없다. 몇몇 학생운동 활동가 후배들의, 힘겨운 몸짓은 보이지만,
그것도 더이상, 학생회 기반의 대중 정치 활동으로서 풀어내어 지고 있지는 못한 듯 보인다. 07년에 80년의 광주를 되새기는 건, 참 버거운
몸짓이었던 걸까…. 정말 80년 5월의 광주는 이제 우리의 머릿속에 '박제'화 된 기억일 뿐인 것일까.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이 대한민국에서 더이상 광주를 아픔으로써, 치열함으로써, 기억한다는
것은 이제 촌스러운 짓이 된 것일까.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이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학점,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토익과 토플 점수,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취업준비. 그렇다면 나는 어떤 위치에 서
있는 걸까.
민중진군 18년 5월
18일. 그로부터 10년이 흘렀고,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되물어본다.
*
약 한달여전, '우주의 죽음'에 대한 포스팅. 그리고 오늘 '5.18' 에 대한 포스팅. 블로그를 접어두고 있었지만, 오늘은 서투르고
다듬어지지 않은 글일지라도 꼭 남겨야했다. 자기반성이기도 하고, 다짐이기도 하고, 또 의무이기도 하다. 꼭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나를
이끌었으니까. 그렇게라도 내 머릿속을 많이 잠식한 망각의 영역을 조금은 줄이고 싶었다. 요즘들어 중요한것들을 망각해가면서 살아가고
있다하더라도,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 망각에 맞서, '잊고 싶지 않은것'들을 한번 일깨워보고 싶었다.
과방에서 선배들이 통키타 하나들고 목놓아 부르던 노래. 단조로운 행진곡풍의 곡조에 투박한 가사, 그러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던
노래. 9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여전히 정중앙에 놓여있었던... 모든 운동의 시작이었던 80년 5월의 빛고을 광주 -5.18
어김없이 매년
5월 18일은 다가옵니다. 또 몇년째, 별생각없이 살아오다가 이날만되면 또 자뭇 진지지고 숙연해지는 가증스러운(?)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곤
합니다. 1980년 5월, 빛고을 광주에서 행해졌던 만행들속에서, 시민군 대오에 있다가 정말 처참하게 희생당한 분들과, 요즘들어 새로이
조명되고 있는 분들 - 징병제하의 대한민국에서 군에 입대했다가,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되어 크나큰 상처를 받고 결국 평생을 고통속에서 지내게
된, 80년 5월의 또다른 희생자들-의 고통스러운 모습들과 함께, 여전히 호위호식하고 있는 29만원짜리 연희동 대저택의 대머리가 떠오르니
여전히 80년 5월의 광주는 -ing 인듯만 합니다.
광주시민들도, 또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사람들도, 질곡되고 일그러진 역사의 희생양인데, 정작 이런 상황을 만들고, 수많은 광주시민들의 피를 뿌리게 한 장본인들은 여전히 일말의 반성도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것 같습니다.
유영철에게는 분노하지만, 그보다 몇십배
몇백배의 학살을 저지른 대머리에게는 왜 관대하게 되는걸까요. 수많은 사람의 생을 앗아간 연쇄살인범 유영철은 죽일놈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는
현재 우선 사형선고를 받았고, 감형의 여지는 있으나, 근시일내에 '특사'라는 이름으로 출소할수 있을 가능성은 없어보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망자와 아직도 행적이 밝혀지지 않은 - 광주 어딘가에 암매장되었을 - 수많은 실종자들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전두환은, 노태우는 왜 그 엄중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특사'라는 이름으로 풀려나올수 있었던 것일까요. 홀리데이의 영화속에서 지강헌역을 맞았던 배우 이성재가 외쳤던(실제로도
지강헌이 그당시 사건현장에서 외쳤었던)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외침이 관철되었던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권무죄 무권유죄'처럼 말입니다.
전두환노태우에게 면죄부를 주려했었던 당시 검찰측의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수 없다.'는 말이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것 같습니다.
저에겐 서울대
79학번의 삼촌이 계십니다. 1979년 10월 26일, 한발의 총성으로 '그'가 사라져간 그날 이후, 수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가슴속에 민주화의
열망과 희망을 가슴에 품었던... '서울의 봄'이라 불리우는 80년 초반기를 대학교 2학년의 입장으로 겪으셨던 분이지요.
삼촌께서 1998년 추석명절때 강원도 영월
할머니집 근방의, 동강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저에게 해주셨던 말씀들을 전 기억합니다.
"살아남은게, 죽어간 이들에게 죄스러웠다. 아무것도 하지못하고, 철저히 통제된 외딴
섬이었던 '광주'를, 마찬가지로 통제된 서울에서 바라보며 발만동동 구르고 있는 무기력한 나자신을 보는게 괴로웠다. 신군부가 정권을 잡기위해
군대를 동권하여 정권을 찬탈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고선 정국을 장악하는 과정속에서, 그것에 반대하며 '계엄령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구호를 외치며 저항했던 광주시민들을, 연일 TV에선 북한공산괴뢰집단의 사주를 받은 폭도라 매도했고, 계엄군들의 만행이 그렇듯 합리화 되는것을
보면서도 그 어떤것도 할수 없는 나자신이 원망스러웠다."
80년대 '전투적 학생운동'의 기풍의
시작은, 바로 80년 5월의 광주였습니다. 80년 5월의 학살을 기반으로 집권한 전두환정권과 그의 후계자 노태우정권을 '괴뢰정권'이라고,
정당성이 없는 정권이라고 규정했던 80년대, 90년대 초반 대학생들의 분노의 마음들이, 치열하고 전투적이었던 학생운동의 기풍을 만들어냈던거라
생각합니다.
정권을 잡기위해, 자기나라 국민을 총칼로
짓밟고 그것도 모라자, 그들을 간첩에 빨갱이로 매도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을 강화시킨 정권이 과연 제대로된 정권이었을까요. 80년 5월
빛고을 광주의 수많은 희생을 밟고 서서 정권을 잡았던 자들의 효과적인 정치선전 덕분에, (그래도 요즈음은 덜해지긴 했지만,) 과거 전라도
사람들은 각종 데마고기의 대상이 되었었습니다. 가해자는 떳떳했고, 피해자들은 계속해서 확인사살 당하며 보이지 않는 편견들을 감내해내야 했으니까말입니다.
(* 데마고기 ; 선동정치가가 특정한
문제에 대하여 정치적인 의도로 유포시키는 선동적 허위선전.)
ps/ 홍세화씨가 '악역을 맡은자의
슬픔'이라는 책에서 말했던것 처럼, 나또한도 이러한 포스팅을 하며 받게 될지도 모르는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는 질문에서 자유로울수 있는
나자신의 출생에 감사해야 하는걸까? 이런 불필요한 부연설명을 달고 있는 나의 자기검열이 슬프지만, 혹이나 있을지 모르는 의문에 미리 답을
해두자면, 내 아버지의 본적지는 강원도 영월이고, 내 어머니의 원 본적지는 경상북도 칠곡이며, 난 서울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 부산과 대전에 잠깐
살았던적이 있다고 하나, 그것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갓난아기시절의 일이고, 나는 서울이외의 곳에서 주거했던 기억이 없는 서울촌놈입니다.
80년
5월의 광주에 대한 저의 짧은 주절거림은 여기서 마치고, '강풀'님의 5.18 관련 작품으로 하고픈말들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강풀님께서
작년(2005년)에 발표하셨던 5.18에 대한 얘기들입니다.
이 노래를 언제 처음 접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이노래를 처음 들었을때, 내눈엔 눈물이 흘렀던거 같다. 추석때, 영월 할머니집으로 향하던 삼촌과의 동행길. 그 차안에서,
이노래를 틀었을때, 삼촌이 나에게 말씀하셨었다. 삼촌께서도 이노래를 처음듣고 눈물을 흘리셨었다고. 대학2학년 때였나... 동강 강변에
포장마차에서, 삼촌에게 학생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을때, 그 어린 조카에게 '20년을 기다렸다'고 말씀하시며, 소줏잔을 기울이셨던 삼촌은,
지금도 나에겐 참 멋진 분이시다.(난 78년생. 삼촌은 79학번)
대학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것은
철거촌에서의 경험이었다. 처음 방패를든 전경(실제로는 의경이겠지)들에게 쫓겨본것도 대학 1학년 3월달, 동대문구에 있었던 철거촌이었으며,
세상이 내가 생각하던대로 아름답지만않다는 것을 깨달았던것도 철거촌이었다. 용역깡패들에 의해서, 70넘게 나이드신 할아버님이 온몸의 뼈가
수십군데 부러지시고, 27살의 어떤 형님은 깡패들에게 잡혀서, 깡패들이 만들었던 사제 화염방사기같은 물건에 의해서, 온몸에 중증화상을 입으시고
온몸이 형체를 알아볼수도 없을만큼 화상을 입으셨던 그때. 온갖 연예인의 시시콜콜한 얘기들도 뉴스에서 까지 주절거리는 언론이, 그 철거촌에서의
치열한 싸움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것을 보면서, 눈으로, 몸으로... 이 세상이 반드시 정의롭지는 않을수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깨달음들을 배울수 있었다,아주 강렬한 느낌으로. 마치 79년 19살 까까머리의 삼촌이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세상이 꺼꾸로
뒤짚히는 느낌이었다는 것처럼.
이 노래의 배경이 되었던, 그 아이들의
죽음... 그 죽음에 대한 다큐를 대학에서 '여성학' 수업을 들으면서 다큐로 본적이 있었다. 그때 정태춘씨는 이노래를 통기타 하나를 들고,
아이들의 장례식장에서 특유의 구슬픈 목소리로 불렀었던걸로 기억한다.
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흘릴수 있었던,
나를 잃고 싶지 않다. 현실속에 무감각해지며, 그져 당연스러운 불가피한 세상사로... 이런일들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려면,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하겠지. 내가 보수적인 입장에서 진보적인 눈빛을 가지는데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지만, 다시 보수적인 눈빛으로 회귀하는데는 그
어떤 노력도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무관심', '내앞가름하기에도 정신없는 삶을 살고 있다'라는 몇마디 변명이면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