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mm? 50mm?

 

카메라를 들고 나가다 보면, 늘 마주하게 되는 고민이 있다. 오늘은 무슨 렌즈를 들고 나가지? 특히나 아이들과의 나들이라면 여러 가지가 고민이 된다. 아이들의 기동성이 무척 좋아지면서 한동안은 줌렌즈를 들고 다녔다. 24-70과 70-200. SONY에서는 2470 렌즈는 금계륵, 70200 렌즈는 금령이라고 별명이 붙여져 있다. 사실 아이들과 나들이 나가서 전천후로 찍을 때. 변화무쌍한 상황에서 즉각 대응할 때 아빠 진사에게 저 두 화각 대의 줌렌즈는 거의 만능에 가깝다. 그래서 나도 한동안 저 두 렌즈를 들고 아이들과 나들이를 나가곤 했었다. 그러다가 단렌즈만이 줄 수 있는 그 한방(?)이 있는 느낌이 그리워져서, 다시금 단렌즈를 꺼내어 놓고 고민하게 된다.

음... 오늘은 35mm를 들고 나가보자. 

그러다가.

35mm만 들고 나가면 아쉬울 때가 있을 텐데. 그래 35mm와 85mm를 조합하자.

그러다가.

음...그냥 50mm 하나로 한번 열심히 발줌해볼까?

이러기를 고민하고 반복. 줌렌즈 단렌즈. 5-6개 바리바리 싸들고 나가기엔. 최근 허리가 너무 안 좋아져서 힘들고. 고민의 무한 루프. 오늘은 그냥 35mm 하나로 조져보자. 50mm 하나로 다 커버해보자. 이러면서 나가는 날. 몸은 편한데, 아쉬움이 생길 때가 많아서. 늘 카메라를 챙길 때는 고민에 빠져든다. 아내와 동네 산책하며 가볍게 스냅사진 찍을 때는 35mm 나 50mm. 마음이 가는 데로 집어 들고 나와도 괜찮은데 아이들과 나들이 나가며, 멋진 한방이 있는 사진과 추억을 기록하는 사진을 둘 다 추구하다 보면 이렇게 결정장애를 겪게 된다. 연휴 기간 내내 아마 나는 비슷한 고민에 빠져들겠지. 어느 화각의 렌즈이건 아이들과의 추억의 시간을 담아줄 것이기에, 무척이나 즐거운 고민이다. 

(결국 어제는 35mm만 집어들었다가, 그래 35mm는 85mm랑 조합해야지. 하면서 렌즈 두 개를 들고 나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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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돌베개 출판사에서 음악평론가 강헌이 쓴 『신해철 In Memory of 申海澈 1968-2014』를 출간하면서텀블벅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고 





당연히  텀블벅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강헌 선생님이  '신해철' 관한 책이라는  자체만으로도구매의 이유는 충분했고거기다가  텀블벅 프로젝트에 참여할  제공되는 각종 리워드가 모두  매력적이었기에.



그리고 3개월가량의 묻지마 기다림물론프로젝트 진행에예정된 날짜들은 있었다그냥 별생각 없이 기다렸다는 의미.  어제 오후드디어 택배가 도착했다이런 류의 포스팅은, 몇 마디 말보다는 사진이다



저자 친필 사인본은 진작 받아보았고후원자 이름이 게재된 신해철 JUKEBOX뮤지컬 <THE HERO> 대본집 특별판도 기대가 되었지만가장 기대했던 것은역시나 한정판 오르골이었다아날로그적 감성 물씬 풍기는 오르골. '일상으로의 초대' 라는 곡을 떠올리면, 1998 열정적이었던 그때 그시절 시공간의 향취까지  가슴에 떠오른다.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게 믿기지 않는다내가 40대에 접어들었다는 것도…  마왕이  세상에 없다는 것도… 모두다 믿기지 않는다.  하아…이런저런 생각들. 추억과 향수. 상념들이 고개를 든다.  어서 자야겠다. 



오르골 태엽을 감고카메라를 들고 손각대로 동영상을 찍었다다음부터 동영상은 왠만하면 삼각대를 써야겠... -_-;;;





본가, 어느 박스 안에 챙겨져 있을, 솔로 앨범들과 넥스트 시절 테이프들 말고는, 모두 다 챙겨와서, 책장 한 칸을 마왕을 위해 꾸며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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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 현대백화점에서 진행되고 있는 태권브이 관련 행사들이 진행된지도 10여 일이 흘렀다. 성현이에게 선물해주겠다는 일념으로 빨빨거리며 본관과 U-PLEX를 종횡무진 누볐다. 이 행사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5종의 피규어 세트’와 ‘태권브이 엽서 세트’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진한 여운을 나에게 남겼다. 그리고 성현이에겐 ‘태권브이’라는 말과 그 의미를 남겼다.



태권브이 피규어와 태권브이 엽서 세트


태권브이 5종 피규어


태권브이 엽서 세트



유한한 삶속에서 추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렬한 여운으로 코끝을 맴도는지를 요즘 들어 절절히 느끼고 있다. 나이를 한살 한살 먹어가는 것은 10대나 20대 때와 다를 바가 없을진대,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가고 나이를 세는 숫자의 카운트에 가속도가 붙어가는 것만 같은 요즈음이다. 속된 말로 정말 무섭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두려움 마져 드는 요즘, 과거의 추억은 참 아련하기만하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추억의 통로로 나를 안내했던 키워드는 ‘태권브이’였다. 시간의 장막을 걷어 젖히고 잠시 돌아간 기억 속의 과거. 유치원생 꼬마인 내가 있고 30대 중반의 젊고 강한 아버지가 계신다. 엄마도 건강하시고 에너지 넘치는 젊은 여인의 모습이다. 치매로 인해 투명인간처럼 無존재가 되어버리신 외할아버지는 독일 병정 같은 건장한 호랑이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마루의 소파에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담배를 피워무신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이곳 연남동은 이렇게 변해버리기 전, 정겨운 동네의 모습이다. 그때 동네의 어르신들. 돌이켜보니 다 내 나이 즈음이거나 나보다 어렸구나. 곧 40대를 바라볼 내 친구들은 다 코흘리개들. 지금은 경의선 숲길 공원으로 변해버린, 철길에서 아이들과 뛰노는 내가 보인다. 손을 뻗어 잡아보고 싶지만, 아스라이 사라져 갈 뿐이다.


아련하기만 한 추억의 시간들.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자체가 길지 않으니, 그 속에서 해맑았던 어린 시절이란 찰나와도 같다. 우리 인간이란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고, 저만치 사라져 가는 그 시간의 흔적들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이렇듯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그 시간들이 눈물겹게 그립고 그립다. 천하무적! 로보트 태권브이는 이렇게 나에게 추억의 애잔함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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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84 태권V를 기억한다. 1978년에 태어났던 나에게, 1976년과 1982년의 태권V보다는 1984년 태권V가 시간적인 접점을 가진다. 여전히 태권V의 가사와 멜로디를 흥얼거릴 수 있는 내가 내 아들과 함께 태권V를 만났던 하루였다


오늘 일요일, 별생각 없이 부모님과 함께 일주일 치 장을 보러 신촌 현대백화점으로 향했다. 1층 입구부터 거대한 태권V 피규어가 서 있는 것을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긴 했었다. 지하 식료품 매장에서 물건을 구입하고 상품권 교환을 위해 5층 데스크에 들렀다가, 두둥- 스탬프 이벤트를 하는 것을 발견했다. 미션 용지에 스탬프 5개를 다 모으면, 태권V 엽서나 태권V 피규어를 준단다.







성현이에게 로봇 태권V 피규어를 안겨줄 생각을 하니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성현이 엄마가 언제 그걸 다 찍고 왔다 갔다 하냐고 말했지만 굴할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이므로. 하하하. 그리하여 나와 성현이 엄마, 아버지, 어머니 이렇게 4장의 미션 용지를 들고, 신촌 현대백화점 본관 1층, 5층, 10층, 그리고 U-PLEX 1층, 12층에 흩어져있는 스탬프 데스크를 모두 찾아가 스탬프를 모두 다 찍었다. (생각해보니 성현이도 한 사람의 사람인데, 성현이 몫까지 찍어야 했던 것 같다. 태권V 피규어도 5개가 풀세트 인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열심히 도장을 찍어 받은 피규어 인증샷은 이 글의 맨 마지막으로 미루기로 하고, 글을 이어 나가보자. 앞에 말했듯 현대 백화점 신촌점 곳곳을 누비면서 도장을 찍는데 그중에는 U-PLEX 12층도 있었다. 거기에서는 태권브이 40주년 특별 전시가 진행 중이었는데, 성현이를 꼭 데려와서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행사를 하는 걸 보면서도 그냥 지나친다면 왠지 부모로서 직무 유기인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리하여 피규어를 받자마자 부모님과 성현이, 나와 아내 이렇게 다섯 명이 다시 전시장으로 고고고.












신촌 현대백화점에서 진행하는 전시는 약간 약식 전시 같고, 고덕동에 브이 센터에서 대규모 전시를 진행하는 것 같다. 아이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물해주러 간 거였는데, 어쩌다 보니 잠시나마 아빠인 내가 추억에 빠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내가 직접 가져 놀던 그 장난감을 발견하고 어찌나 반갑던지. 어찌 보면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이다. 내 아들을 데리고, 내가 내 아들만한 나이의 아이였던 시간의 추억들과 만나게 되는 경험은 참 묘한 느낌을 준다. 인생이란 게 참 짧고 금방 지나간다는 것… 영원을 꿈꾸지만, 유한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네 인간의 한 세대, 그리고 그 안에서도 찰나와 같은 젊음의 시절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룻밤의 꿈과 같이 짧은 것인지…


오늘 스탬프 미션을 다 수행해내고 받은 피규어. 왠지 차렷 자세한 태권브이 하나가 빠진 것 같아 좀 찝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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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를 자발적인 육아휴직 기간으로 정하고, 성현이를 위해 집중적으로 나의 시간을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랬지만 실상 내가 성현이에게 일상을 벗어난 색다른 경험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느껴왔다. 


어제 따스한 봄바람을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문득 든 생각. ‘한강에 가자 !!!’


성현이를 데리고 한강에 온 적은 있었으나, 그건 성현이가 걷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성현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 우리 부부가 바람 쐬러 왔던 거였지, 성현이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나들이는 성현이를 위한 시간이 되게 하리라. 


나 : “성현아! 한강에 갈까? 한강에 가자! 한강이 뭔지 알아?”

성현이 : “한강. 가자.”


내 말을 따라 하는 성현이, 그러나 한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때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 동네 공원 산책에서 좀 벗어나 차를 타고 한강공원 망원지구로 왔다. 분명 성현이의 기억에 아로새겨질 시간이 될 것이라 믿으며.















그리고 어젯밤 잠자리에 누운 성현이가 나에게 말했다.


“아빠, 내일 빵빵 타고 한강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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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의 화창하고도 또 낯설기만했던 봄날즈음... '별은 내가슴에'라는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길거리의 잘 꾸미는 남정네들은 너도나도 안재욱마냥, 젤로 앞머리를 내리고 이오리 셔츠를 입고 다니던 그즈음.


난 고민하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 


내앞에, 매트릭스의 네오에게 주어졌던 빨간알약과 파란알약이 놓여있었던 그때... 

故 정운영 교수님의 글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선택을 했다. 


16년이 지난 요즈음.


갑자기 그 글이 너무 그리워졌다. 구글링해서, 이렇게 내 공간에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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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객의 부(賦)

 

 

至賤한 은행 잎에 Kenney G의 색스폰이 '실루에트'를 토하던 날, 후문을 통과한 나는 에르네스트 만델의 '후기 자본주의'를 강의했다. 오래 전에 엘렌이 녹음해준 테입인데, 11월 오후의 처연한 교정에 제법 어울렸다. 삶의 어느 순간에 만나는 이런 稚氣를 아주 근사한 조화라고 생각할 만큼 나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사실 나의 착각 증세는 이런 등속의 방황보다 한층 더 심각하다. 80년대 중반 마르크스주의가 시대의 양심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시절에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딴죽을 걸었고, 90년대 들어와 '티탄의 추락'으로 조소당할 때는 오늘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고 목청을 높였다. 내가 엇대는 그런 부정을 통해서 학생들이 부정의 부정을 배우기를 바랐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사람들은 나의 그런 은밀한 성의를 '냉소적'이란 한마디 말로 단칼에 잘랐고, 그래서 내심 무척 고독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토록 열렬하던 그들이 반대 편으로 돌아섰을 때, 나는 결코 야유하지 않았다.

 

 

 

진보는 보수보다 우월한 가치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진보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아직도 크로마뇽인의 단계에 머물렀을 터이기 때문이다. 보수는 진보의 이익을 관리하는 것이며, 그리고 더 많은 진보가 보수의 이익을 배반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에 대한 공격은 배반당할 이익이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자기 방어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이 보수 대반격이 별로 신기할 것이 없다. '학회평론'에 보내는 나의 관심은 우선 그 진보 지향에 있다. 그것이 질기고 튼튼하지 않다는 따위의 걱정은 잠시 접어두자. 당신들이 몰두했던 진보에의 신앙이 먼 훗날 한낱 허깨비로 판명되더라도, 지금은 그 진보를 수호하는 노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배반의 기록이 낭자하면, 전설의 "You too, Brutus?"는 우리의 영원한 화두이다. 진보든 '학회평론'이든 우리는 당분간 그 부르투스를 신용하는 수 밖에 없다.

 

 

 

혹시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 진리가 이긴다는 미련은 버려야 한다. 시대가 암담할수록 한층 결연한 각오가 필요하다. 일제의 주구들이 명월관 기생의 장고 소리를 들으며 대동아 공영을 뇌까릴 때, 풍찬노숙을 마다 않고 왜경의 총검을 겁내지 않던 독립지사들은 조국 광복에 몸을 바쳤다. 제국주의가 지구를 분할하던 그 암흑 시절 투쟁의 전망으로 말하자면 친일파의 정세 판단이 앞섰을지 모른다. 결국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는 삶의 고비고비에서 싸우느냐 마느냐를 선택하는 것이지, 그 싸움의 결과로서 이기느냐 지느냐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다. 투쟁의 집합으로서 역사의 승부는 중요한 관건이나, 그 투쟁의 모든 국면에 승리를 '보장'하라는 주문은 매우 무모한 요청이다. 앙가주망(engagement)은 흔히 참여로 번역되지만 그 본래 의미는 拘束(구속)이다.

 

 

 

관악에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있지만, 내가 공부한 루뱅에는 아고라 광장이 있었다. 희랍 민주주의를 상징하던 광장은 벌써 이윤이 지배하는 시장으로 변했고, 고뇌와 분노와 함성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아크로폴리스 역시 이방인의 침노에 무너진 옛 성터처럼 피 흘린 용사들의 노래만을 전하고 있다. 그게 어디 아크로뿐이랴. 한때 부흥회를 연상할 만큼 빽빽히 들어찼던 강의실은 이제 썰렁할 정도로 자리가 비고, 캠퍼스의 百家爭鳴을 알리던 대자보의 치열한 언어도 빛을 잃었다. 사물을 대하는 관점과, 그것을 전하는 대화 내용도 예외가 아니다. 잉여가치 이전의 국제적 메카니즘이 '경쟁력 강화'로 설명되고, 자본주의 전일 체체에의 편입은 '세계화'가 대신한다. 그것은 매우 편리한 변신이지만, 문제의 핵심을 호도하기에 위험한 함정이다. 세계화란 생산조건이 상이한 국가에 단일한 교환기준을 적용함으로써 부등가교환을 강화하는 절차이며,국적을 폐지하여 자본의 활동영역을 확대하려는 노력인데, 이것이 시대의 새로운 우상으로 등장했다. 우상에는 공물을 바쳐야 하고, 그 공물은 인간의 노동 이외에 달리 없는데 말이다.

 

 

 

푸른 하늘을 나는 노고지리가 자유롭다는 시인의 노래가 수정될 만큼 혁명은 고독하고, 또 엄격한 것이어야 한다. 사실 우리는 혁명을 너무 희화적으로 대했다. 자신의 힘을 과신하다가 어이 없이 저지른 실패에 진지한 반성 절차를 거치기도 전에, 이번에는 상대의 힘을 과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연히도 '문민'의 구호는 이들의 과거 청산에 기막힌 구실을 제공했다. 근래에 이 사회 일각에서 줄지어 일어난 전향 서약의 작태를 보노라면 마치 변절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문민을 날조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마저 든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혁명을 믿지 않으면서도 혁명을 외친 이유는 그 자리가 다른 어디보다도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라"는 어느 학생의 고백을 아주 귀하게 받아들인다. 남을 위한 혁명이 아닌 자기를 위한 혁명이란 역설이 매우 당돌하게 들리지만, 그러나 아주 정직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혁명이 아닌 퇴각의 시대이며, 이런 퇴각의 테르미토르에는 그처럼 '이기'에서 출발한 자기 검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會者定離의 고색 창연한 인사를 전해야겠다. 학칙 개정으로 13년간 過客노릇을 하던 관악의 강단을 떠나게 되었다. "공황론에서 배운 것은 취직시험에 도움이 안 되고, 고시에 출제되지 않을 뿐더러, 대학원 입학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한 학생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참으로 쓸데없는 강의를 했다는 민망한 마음과, 이런 과목을 가지고 잘도 배겨냈다는 대견한 감정이 함께 몰려왔다. 그 학생은 저항의 에너지로서 정치경제학의 필요를 역설하면서 나를 위로했지만, 사실 대학강의는 다소 쓸모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다짐이다. 쓸모 있는 부분은 자본이 앞장서서 맡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명제는 사회에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대학에서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미구에 지배세력에 편승할 지식인이 한때 과시하는 현학 취미일지라도, 나는 그런 사치의 유효성을 인정한다.

 

 

 

단 몇줄로 끝나는 내 초라한 이력서에 관악의 과객질은 가장 찬란한 기록이 될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어느 신문사의 食客 노릇을 했다. 과객이든 식객이든 객은 주인의 고마움에 인사를 치러야 하는데, 황망중에 슬쩍 떠나는 비레를 용서하기 바란다. 그 대신 강의실에서 맺었던 잠시잠시의 인연들을 소중히 간직하겠다. 이제껏 염치없이 남의 상만 받았으니, 나도 어서 내 상을 차려야 한다는 초조감이 앞선다. 사르트르를 '망할 녀석'쯤으로 그려놓은 폴 존슨의 책을 읽으면서, 사르트르의 생애를 점령한 '젊음'과 '좌파' 지향을 몹시 부러워하게 되었다.

 

 

 

Bonne chance a tous!

 

모두에게 행운을!

 

 

 

 

 

1994년 12월 21일

 

 

 

鄭雲暎

 

 

 

출처: 학회평론, 1994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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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4일 밤이었나...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블로그의 플러그인들을 이것저것 만지고 있는데, 뭔가 꼬인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PC방 알바에게 가장 손쉬운 컴퓨터 복구가 포맷이듯...;;; 나도 블로그를 백업한후, 블로그 데이터 삭제하고, DB싹 날리고 초기화 한후에, 다시 textcube를 설치하고 복원하는데... 어... 뭔가 이상한 느낌. 아뿔싸... 70여개에 달하는 포스팅의 사진들이 다 엑박으로 표시되는 난감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었다.


2012년 10월 25일 새벽...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어느정도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 갑작스러운 이별. 할아버지를 2012년 10월 27일 좋은 곳으로 보내드리고... 11월  넘어까지는 몸도 마음도 힘든 시기를 보냈다. 이 이야기는 추후에 포스팅을 하기로 하고...



어느정도 정신을 추스리고, 다시 블로그 생각이 떠올라, 다시 블로그 복구를 위해 달려들었지만, 도무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티스토리로 넘어갈까...하는 유혹이 가장 컸던 시기. 며칠간을 매달렸고, 특히 오늘을 포함한 마지막 이틀가량은, 내가 쓰는 호스팅 업체의 고객센터를 전화로 글로 계속 괴롭히며(?)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했다.  


그만큼 이공간은 나에게 있어 많은 것이 담긴 공간이었다. 공개된 포스팅이건, 비공개된 포스팅이건, 함께하는...혹은 함께 했던 아이들과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소중한 공간. 사진을 잃는 다고 추억까지 사라지는건 아니겠지만, 너무나 가슴이 휑해지는 느낌에 더 절실하게 복구에 매달렸다.


그리고, 조금전!!! 블로그의 부활 ㅠㅠ  약간은 뜻밖의 부분에서 실마리를 찾을수 있었지만... 잃어버렸던 아이를 찾은 느낌? 각각의 포스팅들을 클릭할때마다 이제 엑박대신, 냐옹님들의 사진이 나를 반긴다. 휑하게 소멸해버리는 듯 했던, 나의 블로그가 다시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살아난 순간... 기쁘다. 기쁘다.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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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의 저 편으로 멀어져가는 똘레와의 추억들을 움켜쥐고 싶었지만, 그 시간들은  손가락 사이로 속절없이 흘러내리는 고운 모래알과 같았다.    '4월 22일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을때는 똘레가 떠나기 한달전이었네...',   '어제 이맘때쯤엔 똘레가 내곁에 살아있었는데...',   '이틀전 이맘때즘엔, 삼일전 이맘때쯤엔...'  그렇게 똘레와의 이별을 기준으로 시간들을 세어온지 이제 일주일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더 시간이 흐르고... 그렇게 꼽아가는 시간들이 열손가락을 넘어서면서...그 숫자가 커져갈수록... 그렇게 슬픔의 빛깔도 조금씩 옅어져 가겠지. 똘레의 빈자리에 익숙해지는 듯 하다가도, 불현듯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똘레가 없는 9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9일이라는 시간동안 똘레가 없었다는 사실이 갑작스레 낯설게 느껴진다.


#1 / 똘레의 마지막 인사

   5월 21일 저녁, 똘레가 활동성과 식욕이 급감한 것을 확인하고 다음날 병원에 데려가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몇 시간후 5월 22일 새벽에도 똘레를 곁에서 보는데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듯 보였다. 호흡도 나빠지고 걷지도 못한채  아예 얼굴을 바닥에 대고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했고, 일어나서 걸으려 할때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다리가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양옆으로 벌어지는 모습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병원에 갈 요량으로 우선 집에 내려가서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눈을 붙였다. 2시간정도 잤을까... 전화벨이 울렸고,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똘레가 일어서지도 못하고 아예 옆으로 누워서 오줌을 싼다는 것이었다. 불안함이 엄습했다. 아침 9시가 약간 넘은 시간, 택시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똘레는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똘레를 보내주고 이틀정도 지난 월요일인가 어머니가 나에게 한가지 말씀을 해주셨다. 똘레의 마지막 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똘레가 병원가기 몇시간전 아침 6-7시즈음에 부모님께서 식사하시고 계시는데. 똘레가 '야앙'하면서 자기방에서 마루쪽으로 나오더란다. 어머니께서 일어나셔서 똘레방에 갔을때도 누워있기만해서 그냥 쓰다듬어주고 나오셨다는데... 얼마 있다가 똘레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야앙~'하면서 마루로 나와 부모님께서 식사하고 계시는 식탁쪽으로 걸어와서는 식탁에 앉아계신 부모님 다리 사이를 몇 번 자기 몸으로 툭툭 부비며 지나가더란다. 그래서 부모님은, 저 녀석이 힘을 차렸나보다하며 잠시 안도하셨다는데. 그러다가 방으로 들어가서 야옹거리더니,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아예 누워서 오줌을 싸는 것을 보시고는 바로 나한테 전화를 하신거라는 이야기였다. 어머니께서는 '그날 아침 똘레가 엄마하고 아빠한테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던것 같다'며 눈물 지으셨다. 똘레의 마지막 인사. 밤새 몸조차 일으키지 못했던 똘레가 자신의 마지막 기운을 짜내어 했던,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인사... 자신이 다음 날 아침을 맞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이라도 했던 것이었을까...




#2 / 내 동생 같았던 똘레

   2000년 7월부터 옹이를, 당시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와이프가 키우기는 했었지만
  똘레는 내가 키운 첫 고양이였다. 나만의 똘레였고, 똘레만의 나였다. 추운 겨울이면 두툼한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 내 종아리 근처에 몸을 누이고 자던 녀석이었다. 가끔 술한잔 기울이고 집에 들어와서는 잠자는 녀석을 깨워서  그녀석을 향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건네기도 했고... 슬플때 똘레에게 하소연하고 있으면 그녀석은 책상에 앉아있는 내 두 팔사이로 와서 털써덕 안겨서는 나의 이야기에 화답하기도 했다. 모기가 출현하면...똘레와 합동작전을 벌이며 그 모기를 잡기도 했다(사람눈은 모기를 따라가지 못하지만, 똘레는 모기의 움직임에 시야확보가 가능했다)  강산이 한번 변할 시간을 함께 해왔던 추억을 어찌 이 짧은 글에 다 담을수 있을까... 똘레는 내 동생이었고, 나는 똘레에게 때론 퉁명스럽고, 마음만 앞서는 그러나 행동은 상냥하지 못했던 못난 형이었다.

   똘레야...우리 처음만난 날... 넌 조리뽕 과자봉지에 몸이 다 들어갈 정도로 작았었어. 그런 너를 보며  아가였던 네가, 밖에서 겪었을 배고픔과 두려움 대신, 따뜻한 편안함과 안식의 자리를 주겠다 맹세했었어. 그렇게 작았던 네가... 나보다도 훨씬 늦게 태어나고, 어렸던 네가 어째서 나보다더 빨리 어른이 되어서, 이렇게 형이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길을 먼저 떠나간거니... 미안하다. 넌 언제나 나에게, 그 누구에게 보다도 가장 큰 신뢰와 믿음을 보내주었는데. 난 그에 화답하지 못한 것만 같다.




#3 / 눈물은 떨어져도 숟가락은 올라간다

   5월 22일, 아침에 나에게 야옹거리던 똘레를 맡기고 왔던 병원에서, 더이상 나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똘레를 안고 병원을 나서던 그날 저녁. 아무 것도 먹기 싫었다. 똘레는 배가 고팠을텐데... 나혼자 무언가를 먹는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미안했고, 나의 슬픔이 가식이 되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다음 날, 똘레를 보내주고 돌아주고 오는 차 안. 슬픔 속에서 고개를 드는 강한 배고픔을 느꼈다.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인 인간...그 생의 억척스러움이었을까...   눈물은 떨어져도, 숟가락은 올라간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하강과 상승 이미지의 대비니 뭐니 하는 텍스트의 이해가 아니라, 그 말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먹어야 산다는 것. 누군가의 떠나감을 슬퍼하면서도, 눈물을 훔치며 우걱 우걱 무언가를 입으로 밀어넣어야 생을 유지 할 수 있는 유기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의 억척스러움을 보며 느끼게 되는 서글픔이랄까... 말로 풀어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를 느꼈다.  그래...눈물은 떨어져도 숟가락은 올라가지만... 떨어지는 눈물은 여전히 짭자름하고 아프다.



#4
/ 2006년 8월 11일

   똘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더듬어보다가 똘레 가출사건이 문득 떠올랐다. 그 당시 느꼈던  간절함과 다시 똘레를 만난 안도감을 그 글에 기록해둔 것 같았는데, 싸이월드 미니홈피나 예전 블로그를 훑어보아도 도통 그 글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작년 11월에 블로그를 새로 갈아엎으면서, 예전 블로그의 글들은 무료호스팅계정에 걸어두고 있는데. 알고 보니, 그 가출사건(?)에 대한 포스팅은  '비공개 상태'로 잠자고 있었다.  그 글의 포스팅의 말미에 난 이렇게 써놓고 있더라...

 [  똘레 실종사건 060811 (부제 : 다시 찾은 똘레)   http://hunsblog.tistory.com/161  ]

우리는 늘 잊고 살아간다, 늘 소중한 존재들이 곁을 지켜주고 있는데, 늘 함께 있을때는 그 존재들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다가, 그 소중한 존재의 '부재'상황을 맞이하고서야 그것을 깨닫게 되는것 같다. 늘 내곁에 있는 모든 소중한 존재들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과연 나는 그날로부터, 똘레를 정말 보내야했던 2010년 5월 22일까지... 4년에 가까운 시간들을, 내가 내뱉은 그 말처럼 살았던 것일까...혹시 그 소중함과 간절함을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희석시켜온 것은 아니였을까... 난 선언적인 말만 내뱉을 줄 알았지,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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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참 빠르다. 무려...어제그저께가 크리스마스였다니... 어찌되었건, 그날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와이프와 10번째 함께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중에, 두번째 화이트 크리스마스.  2000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당시 여자친구라 불리웠던^^  와이프랑 사귀고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날. 종로쪽으로 버스를 타고 나가고 있었는데 동대문 근처를 지날때즈음, 눈에 펑펑 쏟아졌던 기억이 정말 엊그제 같다. 당시는 디카가 지금처럼 대중화되기전이었고(2002~2003년쯤 부터, 디카가 대중적으로 쓰이기 시작한것 같다. 내가 디카를 처음 구입한 것도 그 즈음이고)  그리하여, 당시 손에 들고 나갔던 똑딱이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그날의 기억들의 유일한 물적 증거가 되고 있다. 싸구려 몇만원짜리 스캐너로 스캔한 작품(?!)이라 사진의 품질이 상당히 열악하지만, 이 한장의 사진 속에 그날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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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다른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했던 것 같다 ^^;;;



   2009년 12월 25일 저녁. 창문을 열어보니, 눈발이 날리는게 아닌가... 감정의 굳은살 저 뒤편에 아직 말랑말랑한 그 무언가가 아직 남아있던 것이었을까... '크리스마스'여서가 아니라,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였기에 잠시 집앞에 홍대 근처로 마실을 나갔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져 걷고 싶었다. 그리고 걸었다. 잠시 피자헛에 들어갔다가... 포인트카드의 혜택없이 피자를 먹는 짓이 왠지 손해 보는 것만 같은 느낌에... 나와서 그져 걸었다. 둘이서 나름 육중한 카메라 손에들고 셀카도 찍고, 2009년 12월 25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들을 눈에 담고 가슴에 담았다.

   눈도 오고, 손도 시리고, 사진찍으러 나온게 아니라 와이프 손잡고 걷기 위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뷰파인더를 보지도 않고, 대충 느낌가는데로 카메라를 조준(!)하고는 셔터를 눌러댔다. 훗날 2009년 12월 25일을 기억케 해줄 습작들. 그 날의 시간들이 얼음땡하고 메모리카드 안에 담겨 나에게 붙들려 와버렸다. 얘들아...그냥 우리랑 함께 지내자.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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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블로그에 있던 글을 2011년 8월 31일 17시 52분에 옮겨놓습니다.
- 글작성 시간은 원본 글의 작성시간에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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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8일 오전, 짱이를 보내주러 가던길, 차창밖으로 내다본 파아란 하늘은 참 슬퍼보였다.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뿌려놓은 씨앗들속에서,
우리의 추억과 기억이 싹트게 되지만,

또한 시간이 흘러가면, 그속에서 싹튼 우리의 추억과 기억은,
움켜쥔 손아귀에서 속절없이 흘러내리는 고운모래의 감촉처럼, 흐릿하게 옅어져간다.

떠나간 존재에 대한 추억의 향기는,
눈물겹게 잡아보려 바둥대도, 언젠가는 희미해져갈 것이라는,
시간의 마법에 대한 예감은, 때론 내 가슴을 쥐어짜게 만들지마는,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삶의 Rule인것을 어찌하겠니...

그러나, 너와 내가 함께 한 시간의 발자취는, 영원히 내가슴에 남아있으리라.

너와 함께한 시간속에서의 웃음.
너와 이별한 후의 눈물.

영원히 내가슴속에 새겨보려, 다시한번 그 시간들을 더듬어본다. Timeless Time...

FOREVER  ZZ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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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블로그에 있던 글을 2018년 7월 11일 11시 05분에 옮겨놓습니다. 

- 글작성 시간은 원본 글의 작성시간에 따릅니다.



돌아보면, 참 어렸었고, 뭘 몰랐었던거지만, 설레는 젊음 하나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그때. 사실, 젊음이라 말하기에도 너무 어렸던 그 시절. 지금도 세상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땐 더 몰랐었고, 그게 어쩌면 그 나이때의 미덕일수도 있었던, 그 시절. 



97년의 사진. 벌써 8년전의 사진이라는게 믿겨지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나이를 먹었나...?


대학교 1학년말 때의 사진같다. 파릇파릇한 새내기(?)라는 이름이 빛바래가던 시절. 이제는 선배가 되는구나...라는 생각에 '말빨'갈고 닦느라 고심했던 시절.




98년 총학생회 선거리플렛


솔리타리테. '연대'라는 구호가 총학생회 모토로 유행했던 99년을 준비했었던, 98년말의 선거시즌. 불특정다수의 대중들에게 뒷담화를 듣기도 했었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뭐 내인생속의 하나의 추억이 되겠지.




Maybe 99년


이사진을 찍고 1년 4개월후...저 모자를 쓰고, 지금의 사랑, 그녀를 만났지. 아...저모자 어디갔을까? 찾아보고 싶다. 

 


 

 

사진찍히면 X된다는, 강박관념때문이기도 했고, 또한 그때는 지금처럼 디카나, 폰카를 지니고 다니면서, 사진으로서 일상을 남기는, 사진의 풍요가 일반화되어있지 않았던 시절들이었기에. 한편으로는 아쉽다. 즐겁게 재밌게 살았던 20대중반이전의 시절들에 대한 모습들은 기억속에만 남아있기에. 어쩌면 그래서 더 아름다울수도 있을테고.

 

 

 

* 세줄요약

- 그땐 그랬지

- 돌아보니 감회가 새롭다

- 그때그때, 사진으로서 기록들을 많이 남겨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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