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고 제목을 쓰려다가, 그건 다소 터프한 글 제목 같아서 살짝 수정.  지난밤 [아빠의 밥 한 끼] 카테고리의 글을 작성해놓고, 블로그 메인화면을 보다가 문득 든 생각이, '육아 블로그'인데? 라는 생각이었다. 그 화면을 캡쳐해서 띄워놓고 보니 더더욱. 

예전, 대학 시절. 우리들의 선배가 그랬듯. 나도 새내기들이 들어오면, 그들 중 몇몇을 사회과학 서점으로 데리고 가서 책을 사주곤 했었다. 대부분은 내가 사주는 생소한(?) 책들을 그냥 받아들게 마련인데. 어떤 당돌한 후배 녀석이 있었다. 선배가 고르는 책을 보면, 선배의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했던 녀석.  '한번 골라보세요~'하는 느낌이랄까? 순간 괜히 뜨끔 했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의도가 읽혀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책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뭐 그 녀석(녀석이라는 단어가 꼭 남성을 의미하진 않는다)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이 있듯 얼마 지나지 않아 참으로 의식 있는 대학생이 되었다. 

다시 원래 글로 돌아와. 내가 쓰는 글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라는 존재의 상황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일 수도 있다. 내가 무엇을 쓰고 있는가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냥 원테이크 글쓰기로 그냥 써 내려가고픈 주제들이 여럿 있었다.  '요즘 좀 바빠서, 정신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핑계를 주섬주섬 꺼내 들어보지만, 그러한 내면의 목소리를 뒤집어보면, 내가 유한한 시간에 굳이 취사선택한 주제들이 위의 글들이라는 것이다. 내 안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간택된 주제들이라는 것. 물론 나의 모든 것을 담아내기에는, 내 블로그상에 진열된 글의 가판대가 다소 좁긴 하지만... 그래도 요즘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화두가 아이들이고, 아버지 되기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Posted by HunS
,

 


아이들과 지내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웃다가 또 울다가.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 고 하던데, 그렇다면 아이들 엉덩이에 하루에 수십 개 뿔이 나야 할 텐데, 아... 웃다가 울기도 해서 뿔이 다시 없어졌나 보다. 아직 유치원 2년 차인 딸내미는 여전히 아기 같은데, 초등학교 2학년 아들 녀석은 이제 제법 몸도 자라고, 목소리도 이젠 아기 티가 사라지고 어엿한 소년의 명랑함이 느껴진다. 몸과 마음이 함께 쑥쑥 자라난다고 하지만, 몸의 자라는 속도가 마음의 그것에 비해 훨씬 빠르다. 겉모습이 자라나면서 그렇게 자란 만큼 아이의 행동도 비례해서 성숙해졌을 거라 지레 생각하곤 하지만, 실제 마음이 성장하는 속도는 그보다는 더딘 것 같다.

오늘 하루도 즐겁게 재잘거리기도 하고, 징징거리기도 하면서 어찌어찌 마무리를 잘해가고 있었는데, 잠들기 전 아이의 말과 행동으로 조금 혼을 냈더니 제법 서운했나 보다. 훌쩍거리며 저만치 떨어져서 잔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성인인 내가 느끼는 옳고 그름의 잣대를 적용하는 실수를 자주 범한다. 요즘 제법 자랐다고 생각하면서 더더욱 그러하다. 조금 전에도 그러했다. 그냥 아이의 칭얼거림과 투정을 아이의 눈높이에서 생각해야 했거늘.  그런데 혼내도 언제나 쪼르르 품에 와서 안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훌쩍거리며 팔 하나 간격 정도 떨어져서 잠드는 아이를 보면서, 문득 이 녀석 정말 점점 자라고 있구나 싶기도 하다. 늘 아기 띠에 안고 다니던 내 어린 아기와 점점 자라고 있는 소년의 아들이 내 안에서도 혼재해 있다. 이렇게 아이들이 자라나는 거겠지. 내가 처음 '아빠'가 되었던 그 순간이 낯설고 새로웠듯, 아이가 자라나면서 보여주는 성장의 스틸컷들은 늘 새롭고 낯설 테고. 어찌되었건, 자기 전에 혼내고 훌쩍이면서 잠든 아이를 보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 '아들아... 아빠 마음은 그런 게 아닌데. 널 혼내고 싶지 않았는데. 혼내고 나서도 이렇게 마음이 안 좋은 아빠의 마음을 너는 알려나?'  

하긴 어떻게 알겠는가. 예전 70년대~80년대 어린 시절  친구 아버지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잘못해서 아버지가 회초리로 종아리를 그렇게 때린 다음에 울면서 잠든 친구 방에 들어가, 퉁퉁 불어서 벌게진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며 마음 아파했다는 이야기. 그 친구 아버지의 마음이 이런 비슷한 종류였을 게다. 다만 그 시절은 아이에 대한 체벌이 사랑의 매. 훈육을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란 이유로 합리화되었고 비교적 익숙했던 시절이었다는 차이가 존재할 뿐. 그러나 밤에 친구 아버지가 울며 잠든 친구 곁으로 가서,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며 마음 아파하고, 자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런저런 말을 했어도, 그것은 그 친구 아버지의 자기 위안일 뿐. 잠든 친구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물론 나중에 자라서 아이를 키우면서 자기 아버지의 일화를 누군가에게 듣는다면, '그때 어떤 마음이셨겠구나.' 하고 훗날 짐작할 수 있을 뿐. 그날 울면서 잠든 친구에겐 서운함과 아픈 종아리만 남았을 게다. 

오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잠든 아이를 보면서, 마음 아파한들. 어찌 아이가 알겠는가. 그저 서운함만 남았을 뿐. 늘 되뇌는 말이다. 전반적으로 조금만 더 참고, 조금만 더 기다려주자. 아직 어린아이이다. 성인의 잣대로 판단하면 안 된다. 아이들은 그렇게 좌충우돌 커가는 것이다. 또, 부모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방향대로 아이가 움직여주기를 기대하지 말자. 나 또한 그러지 않았고, 또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 매일 다짐하며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즐거움과 웃음만이 가득한 하루가 되기를... 







Posted by HunS
,



아이들이 잠든 후에, 내 방으로 와서 책상 앞에 앉았다. 온종일 정신없이 아이들과 부대끼다가, 아이들을 재우고 난 후, 홀로 앉아 나와 마주하는 이 시간. 나 자신과 마주하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때로는 회피하고 싶은 나의 모습마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바라봐야 하는 고난의 과정을 수반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도피로 술을 마시면, 알싸한 취기가 나를 감싸며, 내 가슴안에 도사리던 불안감을 밀어내고 거짓 용기를 심어준다. 그러나 그뿐, 아침이면 다시 퍽퍽한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니,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그래도 아이들과 부대끼고 있는 낮시간은, 울고 웃으며 정신없이 지나간다.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첫째와 지난 6월 1일부터 유치원에 나가기 시작한 둘째. 한국 나이로 8세와 5세의 콜라보는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래서인지 아이들과 부대끼는 이 시간에는 머리는 사유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에 대처하기 바쁘다. 아이들을 재우고 내 방에 와서 앉았다. 갑자기 가슴이 막막해져 온다. 이래저래 쓸데없는 웹서핑을 하면서,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들.


무엇을 해야 하지. 지금. 아…. 왜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힐까.


맥주를 몇 캔 사서 마실까 하다가, 언제까지 달뜬 취기가 주는 휘발성 용기에 취해 계속해서 나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오늘의 나와 이별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맨정신으로 책상에 앉아 이렇게 몇 자 끄적여 본다. 그래 이렇게 다시 마주하고, 다시 일어서고, 무언가 활력을 찾아야겠다. 나의 정신을 빼놓는 아이들은 시간이 되면, 나라는 둥지를 박차오르고, 세상으로 날아오를 것이다. 그때…. 나도 다시 한번 날아보고 싶다. 


카테고리를 일상다반사로 해야 하나, 아버지 되기라는 육아 카테고리로 잡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육아 쪽으로 선택했다. 2013년 12월 26일 내가 '아버지'가 된 이후로 나의 삶은 정말 많이 바뀌었고, 그 비슷한 일들을 7년째, 열심히 해오고 있기에.  그안에서 나를 찾는 노력이라는 것은, 육아와 별개의 이야기가 아닐 게다.









Posted by HunS
,


둘째가 태어난 지는 이제 50일을 향해가고 있고, 올해 12월 26일이면 세 돌이 되는 아들 성현이는 나날이 놀랍게 발전해간다. 이전에도 그러했겠지만 요즘 들어 부쩍, 요 녀석이 자신의 뚜렷한 의지와 주관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2013년 12월 26일생. 아직 36개월도 안 된 아이이지만, 벌써 몇 개월 후면 한국 나이로는 다섯 살이 된다. 한창 예쁜 짓을 많이 할 시기. 애교도 많이 부리고, 뜻밖의 언어적 성장을 보여주어서 주변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한다. 이제는 제법 말도 잘 통한다. 감정표현도 풍부해지고, 스스로의 감정 그 자체도 성인의 그것과 비슷한 것 같다. 또 혼내면 자못 서운한 기색을 보이기도 한다. 당연하겠지.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 혼내고 훈육하면 그것을 그대로 아무 서운함 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는 듯 했던 영유아시기는 이제 거의 다 지나간 듯하다. 아이는 하루하루 드라마틱하게 자라가는데, 정작 부모인 나는, 아이의 성장과 변화를 제대로 인지 못 한 채 아이를 대하기도 하는 것 같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부모가 챙겨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부모가 선택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수동적 객체에서, 점점 능동적 주체로 자라나고 있다. 오로지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지하고, 부모의 통제(?)에 따라야 했던 아이가, 이제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스스로 날기 위한 어설픈 날갯짓을 시작했다고나 할까. 아이는 무언의 이야기를 한다. ‘아빠 !!! 나도 이제 컸어요!!!’


이제 아직 세 돌도 안 된 아이를 바라보면서,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좀 과한 것일까?


뭐라 설명하기 힘든, 묘한 시원섭섭함. 뭐랄까… 아쉬움이 좀 더 진하게 배어 나오는 감정이다. 시간은 화살과도 같이 날아가고, 우리 인간들은 그것을 잡을 수 없다. 뒤집기도 못하던 그때, 목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던 그때, 배밀이를 하던 그때,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하던 그때, ‘아빠, 아빠, 아빠’ 말 한마디에 기뻐하며 동영상을 찍던 그때 그 시절들엔, 아이가 좀 더 빨리 자라나서 의사소통도 하고 같이 능동적으로 교감하게 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앞날을 바라보며 정겹기만 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제는 시간을 잡고 싶은 심정이다. 


조금만 천천히 자라주면 안 될까… 아들아. 내사랑 성현아. 



마왕의 추모식에 참석한 아들 성현이.










Posted by HunS
,


2015년 12월 26일이면 두 돌이 되는 내 아들 성현이.


아이는 정말 하루가 다르게 커간다. 전날까지만 해도 쓰지 못했던 단어들을 오늘 갑작스레 발음하기 시작한다. 자기 주관 & 자기 고집이 형성되었고, 좋고 싫은 것에 대한 의사표시를 명확히 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큰 상들을 제대로 확립해내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다른’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감정 표현이 풍부해진 지는 오래다. 진정 의미를 가지고 기뻐하며 박장대소 꺄르르 웃기도 하고, 강력크하게 떼쓰는 일도 많아졌다. 특히나 요 며칠 사이에 그 떼쓰기의 강도가 확 올라갔다. 아들 녀석은 자기 고집이 있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아이이다. 좋고 싫은 걸 명확히 표현하는 아이. 이러한 성향의 아이를 부모가 잘 키워낸다면, 그 자기 고집과 자기 주관은 아이의 장점이 되어 아이를 빛나게 해줄 것이고, 아이의 삶을 지켜주는 버팀목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자기 고집과 자기 주관을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무작정 꺾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무작정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키울 수도 없다. 그래서, 고민은 시작된다.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인가?’ 라는 것은 여태까지 다소 추상적인 차원의 고민이었는데, 이제는 굉장히 현실적인 차원의 고민이 되었다. 내가 아이가 심하게 떼쓰는 상황을 목도하고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훈육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너무 거창하게 말했나? 딱 한마디로 쉽게 표현하자면, ‘어떻게 혼내야 할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을 일상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일이 무척이나 잦아졌다. 현재 나는, 나 스스로 이런 상황에의 행동지침이나 메뉴얼 같은 게 확립되어 있지 않기에, 내 행동의 일관성이 담보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이가 느끼기에도, 아버지의 반응이 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좋지 못하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건 간에, 아이가 예측 가능한 ‘아버지’여야 한다. 


요즘 반복되는 상황을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우선 나는 최대한 참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다행히도 아이의 떼쓰기가 나의 인내력의 허용범위 내에서 그친다면, 아이는 좋게좋게 이야기하며 달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떼쓰기가 나의 인내력의 한계를 넘어서거나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라 내 인내력이 급격히 낮아진 상태라면, 아이는 버럭 큰소리로 혼내는 모습의 아버지를 보게 될 것이다. 나도 아버지이기 이전에, 부족하디 부족한 그냥 인간이기에, 내 감정적 상태에 따라 내 반응의 양태가 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나 스스로가 컨트롤되지 못했음을 느낄 때, 너무나 크게 후회하게 된다.


어떠한 포지션을 취할 것인가.  그때그때의 감정에 기대어 아이를 키울수는 없다.  아마도 내 고민의 종착지점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히 규정하는 것일듯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로서 아버지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을 하지 않는 것.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봐야겠다.




목욕하러 들어가기 전 한 컷. 아이의 해맑음 웃음 지켜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Posted by HunS
,


아이를 키우다 보면, 참을 인(忍) 글자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들 한다. 참아야지. 화내지 말아야지. 늘 생각하지만, 그러한 나의 결심은 길게 이어지지 못할 때가 많다.


뒤집지도 못하고 누워서, 배고프면 빼에에 울고 눈만 껌뻑이던 신생아 시절을 지나, 이제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자기 고집도 제법 생긴 22개월짜리 아들. 요 녀석과 조금 부대끼다 보면, 내 인격의 바닥을 본다. 아… 이 부족하디 부족한 아버지여. 그대의 아버지는 진정 어른스러운 아버지이셨건만 그대는 왜 그러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이를 키우고 아버지로서 역할 하면서, 내 아버지가 진정 성인군자셨다는 것을 느낀다. 


늘 반성하고 경계하자. 나의 편의를 위해서 아이의 행동을 통제하면서, 그것이 여의치 않았을 때 가장 쉬운 선택을 해오지는 않았는지? 또 아이를 혼낼 때 그것이 긍정적인 훈육이 아닌 스스로 감정을 제대로 제어 해내지 못한 ‘못난 화풀이’ 수준의 것은 아니었는지. 


아이는 순백의 도화지를 가지고 태어난다. 훗날에는 아이 스스로 그 도화지 위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나가겠지만, 지금 이렇게 어린 영유아 혹은 어린이 시기에는, 부모의 행동과 역할이 그 도화지에 자국을 남기게 마련이다. 내 아버지로서의 역할이란 그 도화지에 멋들어진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도화지에 나쁜 얼룩이 묻지 않도록 그래서 아이가 그 위에 마음껏 자신의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도록 보호해주는 것일진대, 내가 내 인격의 미성숙함으로 내 아이의 도화지에 얼룩을 남길 수는 없지 않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나의 분신. 내 아들 성현이. 사실 나도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내가 이토록 아이를 좋아할 줄은 몰랐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나도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아이가 태어나고 이제 2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참 많은 게 바뀌었지. 아이가 태어나고 커가면서, 나 또한 점점 아버지가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아이가 10대 시절에도 또 그 이후에도 대화의 상대로 남을 수 있는 아버지 되기. 그게 아버지로서 나의 목표인데, 그러려면. 요즘 들어 자주자주 마주하게 되는 내 인격의 바닥을 좀 멀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성현이 ^^








Posted by HunS
,

2013년 12월 26일. 나는 아버지가 되었다. 성현이와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의 느낌을 여전히 기억한다.


약간의 피로감이 뒤섞인 채 바라보았던 그 분만실의 어두운 조명과 잔잔한 클래식의 선율. 우리 부부가 이전에 미리 선택했던 출산의 조건들이었다. 단 한 가지가 달랐다. 우리가 선택했던 건, 내가 출산의 전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은 채, 출산이후 탯줄을 자르는 것이었다.진통이 오고, 양수가 터지고 얼떨결에 분만실로 아내의 손을 붙잡고 들어갔고, 출산의 전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얼떨떨한 그 느낌. 어색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랬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내가 부르는 이름이었지, 내가 불리는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임신을 지켜보면서, 내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것을 머리로 인식해가긴 했지만, 가슴으로 느끼진 못했던 것 같다. 어찌 되었던 나는 아버지가 되었고, 21개월 가까운 시간이 흘러갔다. 그 시간 속에서 이름만 아버지였던 나는, 조금씩 아버지가 되어갔다.


누구나 처음 부모가 되어보고, 처음 아이를 키워본다. 미리 상상해보고 책을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은 글로 배워지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닌듯하다. 대부분 처음 마주하게 되는 상황들. 그 속에서의 선택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부모가 되어간다.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리고 나의 철학이 아이 앞에서 갈지자처럼 갈팡질팡 우왕좌왕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여기에 내가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들을 기록하고자 한다. 육아 일기 일수도 있고, 그냥 푸념 어린 끄적임일수도 있다. 정확히 무언가를 정하고 시작하는 건 아니다. 기록이 기억을 이끌어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기록해야 한다.



우선, 돌잔치 때의 성장 동영상이나 2013~2014년 1년간의 기록으로 모아놓은 사진 업로드부터...^^








 

Posted by Hu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