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의 화창하고도 또 낯설기만했던 봄날즈음... '별은 내가슴에'라는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길거리의 잘 꾸미는 남정네들은 너도나도 안재욱마냥, 젤로 앞머리를 내리고 이오리 셔츠를 입고 다니던 그즈음.


난 고민하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 


내앞에, 매트릭스의 네오에게 주어졌던 빨간알약과 파란알약이 놓여있었던 그때... 

故 정운영 교수님의 글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선택을 했다. 


16년이 지난 요즈음.


갑자기 그 글이 너무 그리워졌다. 구글링해서, 이렇게 내 공간에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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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객의 부(賦)

 

 

至賤한 은행 잎에 Kenney G의 색스폰이 '실루에트'를 토하던 날, 후문을 통과한 나는 에르네스트 만델의 '후기 자본주의'를 강의했다. 오래 전에 엘렌이 녹음해준 테입인데, 11월 오후의 처연한 교정에 제법 어울렸다. 삶의 어느 순간에 만나는 이런 稚氣를 아주 근사한 조화라고 생각할 만큼 나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사실 나의 착각 증세는 이런 등속의 방황보다 한층 더 심각하다. 80년대 중반 마르크스주의가 시대의 양심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시절에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딴죽을 걸었고, 90년대 들어와 '티탄의 추락'으로 조소당할 때는 오늘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고 목청을 높였다. 내가 엇대는 그런 부정을 통해서 학생들이 부정의 부정을 배우기를 바랐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사람들은 나의 그런 은밀한 성의를 '냉소적'이란 한마디 말로 단칼에 잘랐고, 그래서 내심 무척 고독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토록 열렬하던 그들이 반대 편으로 돌아섰을 때, 나는 결코 야유하지 않았다.

 

 

 

진보는 보수보다 우월한 가치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진보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아직도 크로마뇽인의 단계에 머물렀을 터이기 때문이다. 보수는 진보의 이익을 관리하는 것이며, 그리고 더 많은 진보가 보수의 이익을 배반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에 대한 공격은 배반당할 이익이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자기 방어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이 보수 대반격이 별로 신기할 것이 없다. '학회평론'에 보내는 나의 관심은 우선 그 진보 지향에 있다. 그것이 질기고 튼튼하지 않다는 따위의 걱정은 잠시 접어두자. 당신들이 몰두했던 진보에의 신앙이 먼 훗날 한낱 허깨비로 판명되더라도, 지금은 그 진보를 수호하는 노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배반의 기록이 낭자하면, 전설의 "You too, Brutus?"는 우리의 영원한 화두이다. 진보든 '학회평론'이든 우리는 당분간 그 부르투스를 신용하는 수 밖에 없다.

 

 

 

혹시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 진리가 이긴다는 미련은 버려야 한다. 시대가 암담할수록 한층 결연한 각오가 필요하다. 일제의 주구들이 명월관 기생의 장고 소리를 들으며 대동아 공영을 뇌까릴 때, 풍찬노숙을 마다 않고 왜경의 총검을 겁내지 않던 독립지사들은 조국 광복에 몸을 바쳤다. 제국주의가 지구를 분할하던 그 암흑 시절 투쟁의 전망으로 말하자면 친일파의 정세 판단이 앞섰을지 모른다. 결국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는 삶의 고비고비에서 싸우느냐 마느냐를 선택하는 것이지, 그 싸움의 결과로서 이기느냐 지느냐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다. 투쟁의 집합으로서 역사의 승부는 중요한 관건이나, 그 투쟁의 모든 국면에 승리를 '보장'하라는 주문은 매우 무모한 요청이다. 앙가주망(engagement)은 흔히 참여로 번역되지만 그 본래 의미는 拘束(구속)이다.

 

 

 

관악에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있지만, 내가 공부한 루뱅에는 아고라 광장이 있었다. 희랍 민주주의를 상징하던 광장은 벌써 이윤이 지배하는 시장으로 변했고, 고뇌와 분노와 함성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아크로폴리스 역시 이방인의 침노에 무너진 옛 성터처럼 피 흘린 용사들의 노래만을 전하고 있다. 그게 어디 아크로뿐이랴. 한때 부흥회를 연상할 만큼 빽빽히 들어찼던 강의실은 이제 썰렁할 정도로 자리가 비고, 캠퍼스의 百家爭鳴을 알리던 대자보의 치열한 언어도 빛을 잃었다. 사물을 대하는 관점과, 그것을 전하는 대화 내용도 예외가 아니다. 잉여가치 이전의 국제적 메카니즘이 '경쟁력 강화'로 설명되고, 자본주의 전일 체체에의 편입은 '세계화'가 대신한다. 그것은 매우 편리한 변신이지만, 문제의 핵심을 호도하기에 위험한 함정이다. 세계화란 생산조건이 상이한 국가에 단일한 교환기준을 적용함으로써 부등가교환을 강화하는 절차이며,국적을 폐지하여 자본의 활동영역을 확대하려는 노력인데, 이것이 시대의 새로운 우상으로 등장했다. 우상에는 공물을 바쳐야 하고, 그 공물은 인간의 노동 이외에 달리 없는데 말이다.

 

 

 

푸른 하늘을 나는 노고지리가 자유롭다는 시인의 노래가 수정될 만큼 혁명은 고독하고, 또 엄격한 것이어야 한다. 사실 우리는 혁명을 너무 희화적으로 대했다. 자신의 힘을 과신하다가 어이 없이 저지른 실패에 진지한 반성 절차를 거치기도 전에, 이번에는 상대의 힘을 과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연히도 '문민'의 구호는 이들의 과거 청산에 기막힌 구실을 제공했다. 근래에 이 사회 일각에서 줄지어 일어난 전향 서약의 작태를 보노라면 마치 변절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문민을 날조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마저 든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혁명을 믿지 않으면서도 혁명을 외친 이유는 그 자리가 다른 어디보다도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라"는 어느 학생의 고백을 아주 귀하게 받아들인다. 남을 위한 혁명이 아닌 자기를 위한 혁명이란 역설이 매우 당돌하게 들리지만, 그러나 아주 정직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혁명이 아닌 퇴각의 시대이며, 이런 퇴각의 테르미토르에는 그처럼 '이기'에서 출발한 자기 검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會者定離의 고색 창연한 인사를 전해야겠다. 학칙 개정으로 13년간 過客노릇을 하던 관악의 강단을 떠나게 되었다. "공황론에서 배운 것은 취직시험에 도움이 안 되고, 고시에 출제되지 않을 뿐더러, 대학원 입학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한 학생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참으로 쓸데없는 강의를 했다는 민망한 마음과, 이런 과목을 가지고 잘도 배겨냈다는 대견한 감정이 함께 몰려왔다. 그 학생은 저항의 에너지로서 정치경제학의 필요를 역설하면서 나를 위로했지만, 사실 대학강의는 다소 쓸모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다짐이다. 쓸모 있는 부분은 자본이 앞장서서 맡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명제는 사회에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대학에서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미구에 지배세력에 편승할 지식인이 한때 과시하는 현학 취미일지라도, 나는 그런 사치의 유효성을 인정한다.

 

 

 

단 몇줄로 끝나는 내 초라한 이력서에 관악의 과객질은 가장 찬란한 기록이 될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어느 신문사의 食客 노릇을 했다. 과객이든 식객이든 객은 주인의 고마움에 인사를 치러야 하는데, 황망중에 슬쩍 떠나는 비레를 용서하기 바란다. 그 대신 강의실에서 맺었던 잠시잠시의 인연들을 소중히 간직하겠다. 이제껏 염치없이 남의 상만 받았으니, 나도 어서 내 상을 차려야 한다는 초조감이 앞선다. 사르트르를 '망할 녀석'쯤으로 그려놓은 폴 존슨의 책을 읽으면서, 사르트르의 생애를 점령한 '젊음'과 '좌파' 지향을 몹시 부러워하게 되었다.

 

 

 

Bonne chance a tous!

 

모두에게 행운을!

 

 

 

 

 

1994년 12월 21일

 

 

 

鄭雲暎

 

 

 

출처: 학회평론, 1994 겨울








Posted by Hu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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