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제 저녁 즈음. 故 박원순 서울시장님의 실종 관련 속보를 접했다. 처음에는 뭐 작은 해프닝이겠거니 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저런 안 좋은 속보들이 쏟아지고, 가슴속에도 좋지 못한 예감이 들면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12시 즈음 수색 관련 뉴스를 보고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얼마 후. 노컷뉴스에서 뜬 속보를 보았다. 


오보 아닐까 하는 초라한 기대를 가졌지만, 사망을 확인해주는 공식적인 뉴스들이 여러 언론 매체에서 쏟아졌다. 새벽 2시.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장의 브리핑을 보면서, 이름조차 언급해주고 싶지 않은, 우익 유튜버의 저열한 질문을 보면서 분노했다. 자살 보도 권고 기준 관련 보도지침http://www.journalist.or.kr/news/section4.html?p_num=12 )  자체를 알 리도 없지만, 알았더라도 지킬 생각도 없었을 그의 역겨운 질문들.  일단 그런 브리핑 현장에, 우익 유튜버 나부랭이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참 의아스러운 일.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가슴이 무겁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정방향으로 움직여왔던 중요한 한 축이 무너져 내린 듯한 상실감.  물론 어제 이야기 되었던, 좋지 않은 이야기들까지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지금은. 적어도 죽음을 애도할 기간 동안은 이런저런 모든 이야기는, 일단 미루어두고... 故 박원순 서울시장님의 명복을 빌고 싶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편히 쉬소서.



아…. 그리고 한가지. 죽음을 대하는 자세.


어제 내가 놀랐던 것은, 관련 뉴스를 보도하는 실시간 생방송 채널에 올라오는 채팅창의 글들이었다.  죽음을 두고, 진심으로 낄낄낄 거리는 글들. 아무렇지 않게 그런 글들을 써 내려 갈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악플을 달아보지 않았다. 반대하고 싶은 의견엔 정중하게 반박 글을 달았었다. 저열한 욕지거리나 악플은 내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라 생각했다.  


뭐 요즘 워낙 악플들이 일상화되어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저렇게 악플을 달고, 죽음 앞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시시덕거리며 조롱의 글을 뱉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알고 보면 내 곁에 평범한 얼굴로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에,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DAUM 뉴스의 댓글을 보면서 우연히 MY 라는 것을 눌러보니, 내가 쓴 댓글들을 볼 수 있더군. 사실 댓글을 거의 보지도 않고, 달지도 않기에 잊고 있었던 댓글들이 보이더라. 

아래는 2013년 고 성재기 씨 사망 사건에 내가 쓴 댓글이다. 

뭐 나의 방식만이 옳다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죽음 앞에선... 이래야 하지 않을까.

상대방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죽음 앞에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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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연남동, 그리고.

 

"혁명은 없고, 착취는 영원하다."




1990년대, 종로 한복판에서 노동절 집회의 대오가 지나간 후, 그 종로 거리의 어딘가 한켠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벽에 쓰여있는 구호가 아니다. 맞아, 아마 그 시절 목격했더라면, 약간 얼치기 같은 어설픔을 느꼈을 것 같다. 대학 들어와서, 사회과학 책을 막 접한 새내기가 아직 사회과학적 문법도 익숙하지 않은 채 써 내려간 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90년대 중후반에도, 유려한 혁명의 문체로 문학적 서사를 쏟아내던 무수한 익명의 그들이 있었으니. 사실 저 몇 마디 문구는 어설프기 그지없다. 그 당시의 시선으로 보면 말이다.


이미. 혁명의 시대가 아니라, 퇴각의 시대…. 라는 자조적인 읊조림을 되뇌어온 지도…. 20-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대학 새내기시절. 메이데이 집회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꽃병이 날아다니고, 쇠파이프가 아스팔트 위에서 둔탁한 무게감을 확인시켜주던 그때, 울려 퍼지던, 혁명의 노래들…. 예를 들면, '혁명의 투혼'. 으아아아. 여전히 가슴 뛰게 만드는 그 노래에서의 '혁명'이라는 단어. 혁명... 혁명... 혁명.  그때 그 시절, 나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는,  내가 가슴 가득 받아 안고는 싶은데 왠지 낯설고 영원히 품을 수 없는 단어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혁명이라는 단어를 오롯이 가슴속에 품을 수 있는 척하고 싶었다.  그때 나는 스무 살 청춘이었으니까.


흔히 말하는 중산층 가정에서, 대기업에 다니는 아버지와 전업주부이신 어머니의 보살핌 아래서 크게 부족할 것도 없고, 또 그렇다고 아주 충만하지도 않은 평범한 삶을 살아온 내가 느꼈던 '혁명'에 대한 감상. 어찌 보면 마음속 깊숙이 진정 혁명을 믿지 않으면서도, 혁명을 외쳤던 20대 청춘은... 혁명을 외치는 해방구적 공간 안에서, 사회적인 예속과 억압에의 해방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으으으…. 이런저런 주절거림이 길었다. 그냥, 딱 보고 심쿵했던 순간에 대한 포스팅이라.




그런데, 내가 이것을 목격한 것은... 2020년의 6월의 어느 날 아침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요즈음 핫플레이스라는 연남동의 어느 곳.


딸아이 유치원 등원시켜주면서, 아직은 이른 시간. 문 열지 않은 음식점의 외부 주차장 벽의 모습.


그냥... 혁명이란 모습을 마주한. 마음만은 스무 살 그때 그대로인, 43살 청년(?)의 감상이라고 해둡시다.


딸아이 등원시키면서, 유치원 버스 오기 전까지,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 그는 이런저런 상념에 젖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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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 멀어져 간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간다. 그렇게 하루, 하루,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진 시간의 지층을 우리는 '세월'이라 칭한다. 연속되는 시간의 흐름, 그 거센 물결 속에 서 있을 때는 세월의 위력을 잘 체감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연속되는 시간의 흐름에 잠시 무중력상태의 진공과도 같은 균열이 생길 때가 있다. 그때 문득 고개를 들어, 켜켜이 쌓인 그 시간의 퇴적층의 단면을 바라보게 되는 찰나와 같은 순간, 우리는 세월이라는 존재의 위력을 체감한다.


나는 어린 시절의 나 그대로인데, 변한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어느날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볼 때, 거울 속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이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매일 보던 내 얼굴을 타자화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그 순간. 나는 세월의 민낯과 마주한다.



나이를 먹어간다는것.



거울 속에 앳된 얼굴의 아이가 있다. 마냥 세상이 신기하기만 한 그 아이는 연신 웃는 얼굴이다. 그러다 그 아이의 얼굴에 여드름이 생기기 시작하고, 호기롭게 담배를 문 대학생의 모습이 되기도 하고, 술에 취해 울긋불긋 벌게진 청년의 얼굴도 보인다. 그래도 나에게는 늘 익숙한 얼굴들이다. 그렇게 수많은 내가 오버랩되면서, 어느 순간 거울 속에 수염 까칠까칠, 웃으면 누가에 잔주름도 보이는 마흔 살 넘은 아저씨가 서 있다. 아뿔싸. 저게 나구나.


그런데,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슬픈 건,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변화하는 것 때문은 아니다. 사실 거울 속의 내 얼굴은, 대개 늘 같아 보이기 마련이거든.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조차, 본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체감하지 못할 때가 많다. 시공간의 균열이 생기는 찰나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나에게 있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선사해주는 진정한 비극은, 나를 둘러싼 많은 사람이 늙어가고, 변해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게 참 슬픈 일이더라. '네 나이 먹는 것은 생각 안 하냐?' 하지만, 사람이란 존재는 원래 '제 나이 먹는 것'은 잘 생각 못 하기 마련이거든.


젊고 강하고 매력적이던 아빠, 엄마는 자글자글 주름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버렸고, 젊음의 에너지 가득하던 청년이고 아가씨였던 '나의 어른들'은 머리 희끗희끗한 장년의 나이가 되었다. 그 시절 나의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시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입관하던 날.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느낀 것은, '죽음'이라는 추상적 개념의 실체화된 모습에 대한 낯섦의 감정이기도 했지만, 내가 알던 나의 세상, 그 세계의 한 축을 짊어져 오던 친숙한 존재가, 영원히 퇴장한다는 사실에 대한 서글픔과 허망함이었다. 우리는 한 단계 한 단계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으로 떠밀려갈 것이고, 그러다 보면 나 역시 그렇게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까지.

그 시절 '나의 어른들'에게 거금 1000원을 받고 300원을 쓴 어린 꼬마아이. 거스름돈으로 남은 그 크나큰 700원을 어찌할 바를 몰라, 남의 집 대문  앞 계단 위에 일곱 개의 동전을 고스란히 쌓아놓고 집으로 돌아오던 유치원생 아이가, 마흔 살 넘은 아저씨가 되었으니, 그만큼의 세월만큼 '나의 어른들'도 저만치 앞으로 걸어 나가신 건 당연한 일이기도 할게다. 그렇지만 그 퇴적된 시간의 단면을 체감하는 그 순간들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의 시간이 흘러가고, 나의 세월이 흘러가고, 내가 나이를 먹어감과 동시에, '나의 어른들'도 나이를 먹고, 늙고 약해져만 간다.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뎌낼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문득문득 인식될 때마다, 애잔하고 슬프다. 생로병사. 우리네 삶에 주어진 피할 수 없는 그 과정들을, 글자로만 이해하고 머리로만 이해하다가, 눈으로 확인하고 가슴으로 체감하게 되는 것. 나에게 있어 세월이란, 그런 것 같다.

가슴 속에서 잘 정리되지, 않는 슬픈 상념들을 일단 끄적여본다. 
그냥 끄적여보고 싶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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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상한 세월이다. 그 뭐냐. 러시아 전통인형 중에, 인형 안에 인형이 계속 들어있는 '마뜨료쉬까'마냥... 까면 깔수록 계속 나온다.  야당에서도 대통령 하야라는 구호가 정치적 수사로써 등장한, 말 그대로 '하야 정국'


Matryoshka. 구글이미지 검색.

  





보슬보슬 비가 내리던 어제저녁, 정육점에 들러 삼겹살을 사서 오는 길에 마주친 광경에 이 블로그 포스팅을 쓰게 되었다. 종로 한복판이나 광화문에서 큰 집회가 열릴 때 등장한 그림이 아니라, 평화로운(?!) 동네에 등장한 '정치적 벽화'를 보면서, 현 시국이 단순히 단발성 집회 몇 번으로 사그라들 정세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저런 정치공학적인 내용은 생략하자. 이미 많은 내용들이 드러난 상태이다. 클릭 몇 번이면 충분히 현 정세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름대로 정리해낼 수 있을 것이다. 


모순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모순이 곪아 터져 나오고 있고, 시민들의 정치적 저항들도 다시금 시작되고 있다. 한번 지켜보자. 과연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어떻게 써나갈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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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의 화창하고도 또 낯설기만했던 봄날즈음... '별은 내가슴에'라는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길거리의 잘 꾸미는 남정네들은 너도나도 안재욱마냥, 젤로 앞머리를 내리고 이오리 셔츠를 입고 다니던 그즈음.


난 고민하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 


내앞에, 매트릭스의 네오에게 주어졌던 빨간알약과 파란알약이 놓여있었던 그때... 

故 정운영 교수님의 글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선택을 했다. 


16년이 지난 요즈음.


갑자기 그 글이 너무 그리워졌다. 구글링해서, 이렇게 내 공간에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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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객의 부(賦)

 

 

至賤한 은행 잎에 Kenney G의 색스폰이 '실루에트'를 토하던 날, 후문을 통과한 나는 에르네스트 만델의 '후기 자본주의'를 강의했다. 오래 전에 엘렌이 녹음해준 테입인데, 11월 오후의 처연한 교정에 제법 어울렸다. 삶의 어느 순간에 만나는 이런 稚氣를 아주 근사한 조화라고 생각할 만큼 나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사실 나의 착각 증세는 이런 등속의 방황보다 한층 더 심각하다. 80년대 중반 마르크스주의가 시대의 양심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시절에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딴죽을 걸었고, 90년대 들어와 '티탄의 추락'으로 조소당할 때는 오늘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고 목청을 높였다. 내가 엇대는 그런 부정을 통해서 학생들이 부정의 부정을 배우기를 바랐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사람들은 나의 그런 은밀한 성의를 '냉소적'이란 한마디 말로 단칼에 잘랐고, 그래서 내심 무척 고독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토록 열렬하던 그들이 반대 편으로 돌아섰을 때, 나는 결코 야유하지 않았다.

 

 

 

진보는 보수보다 우월한 가치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진보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아직도 크로마뇽인의 단계에 머물렀을 터이기 때문이다. 보수는 진보의 이익을 관리하는 것이며, 그리고 더 많은 진보가 보수의 이익을 배반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에 대한 공격은 배반당할 이익이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자기 방어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이 보수 대반격이 별로 신기할 것이 없다. '학회평론'에 보내는 나의 관심은 우선 그 진보 지향에 있다. 그것이 질기고 튼튼하지 않다는 따위의 걱정은 잠시 접어두자. 당신들이 몰두했던 진보에의 신앙이 먼 훗날 한낱 허깨비로 판명되더라도, 지금은 그 진보를 수호하는 노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배반의 기록이 낭자하면, 전설의 "You too, Brutus?"는 우리의 영원한 화두이다. 진보든 '학회평론'이든 우리는 당분간 그 부르투스를 신용하는 수 밖에 없다.

 

 

 

혹시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 진리가 이긴다는 미련은 버려야 한다. 시대가 암담할수록 한층 결연한 각오가 필요하다. 일제의 주구들이 명월관 기생의 장고 소리를 들으며 대동아 공영을 뇌까릴 때, 풍찬노숙을 마다 않고 왜경의 총검을 겁내지 않던 독립지사들은 조국 광복에 몸을 바쳤다. 제국주의가 지구를 분할하던 그 암흑 시절 투쟁의 전망으로 말하자면 친일파의 정세 판단이 앞섰을지 모른다. 결국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는 삶의 고비고비에서 싸우느냐 마느냐를 선택하는 것이지, 그 싸움의 결과로서 이기느냐 지느냐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다. 투쟁의 집합으로서 역사의 승부는 중요한 관건이나, 그 투쟁의 모든 국면에 승리를 '보장'하라는 주문은 매우 무모한 요청이다. 앙가주망(engagement)은 흔히 참여로 번역되지만 그 본래 의미는 拘束(구속)이다.

 

 

 

관악에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있지만, 내가 공부한 루뱅에는 아고라 광장이 있었다. 희랍 민주주의를 상징하던 광장은 벌써 이윤이 지배하는 시장으로 변했고, 고뇌와 분노와 함성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아크로폴리스 역시 이방인의 침노에 무너진 옛 성터처럼 피 흘린 용사들의 노래만을 전하고 있다. 그게 어디 아크로뿐이랴. 한때 부흥회를 연상할 만큼 빽빽히 들어찼던 강의실은 이제 썰렁할 정도로 자리가 비고, 캠퍼스의 百家爭鳴을 알리던 대자보의 치열한 언어도 빛을 잃었다. 사물을 대하는 관점과, 그것을 전하는 대화 내용도 예외가 아니다. 잉여가치 이전의 국제적 메카니즘이 '경쟁력 강화'로 설명되고, 자본주의 전일 체체에의 편입은 '세계화'가 대신한다. 그것은 매우 편리한 변신이지만, 문제의 핵심을 호도하기에 위험한 함정이다. 세계화란 생산조건이 상이한 국가에 단일한 교환기준을 적용함으로써 부등가교환을 강화하는 절차이며,국적을 폐지하여 자본의 활동영역을 확대하려는 노력인데, 이것이 시대의 새로운 우상으로 등장했다. 우상에는 공물을 바쳐야 하고, 그 공물은 인간의 노동 이외에 달리 없는데 말이다.

 

 

 

푸른 하늘을 나는 노고지리가 자유롭다는 시인의 노래가 수정될 만큼 혁명은 고독하고, 또 엄격한 것이어야 한다. 사실 우리는 혁명을 너무 희화적으로 대했다. 자신의 힘을 과신하다가 어이 없이 저지른 실패에 진지한 반성 절차를 거치기도 전에, 이번에는 상대의 힘을 과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연히도 '문민'의 구호는 이들의 과거 청산에 기막힌 구실을 제공했다. 근래에 이 사회 일각에서 줄지어 일어난 전향 서약의 작태를 보노라면 마치 변절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문민을 날조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마저 든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혁명을 믿지 않으면서도 혁명을 외친 이유는 그 자리가 다른 어디보다도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라"는 어느 학생의 고백을 아주 귀하게 받아들인다. 남을 위한 혁명이 아닌 자기를 위한 혁명이란 역설이 매우 당돌하게 들리지만, 그러나 아주 정직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혁명이 아닌 퇴각의 시대이며, 이런 퇴각의 테르미토르에는 그처럼 '이기'에서 출발한 자기 검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會者定離의 고색 창연한 인사를 전해야겠다. 학칙 개정으로 13년간 過客노릇을 하던 관악의 강단을 떠나게 되었다. "공황론에서 배운 것은 취직시험에 도움이 안 되고, 고시에 출제되지 않을 뿐더러, 대학원 입학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한 학생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참으로 쓸데없는 강의를 했다는 민망한 마음과, 이런 과목을 가지고 잘도 배겨냈다는 대견한 감정이 함께 몰려왔다. 그 학생은 저항의 에너지로서 정치경제학의 필요를 역설하면서 나를 위로했지만, 사실 대학강의는 다소 쓸모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다짐이다. 쓸모 있는 부분은 자본이 앞장서서 맡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명제는 사회에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대학에서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미구에 지배세력에 편승할 지식인이 한때 과시하는 현학 취미일지라도, 나는 그런 사치의 유효성을 인정한다.

 

 

 

단 몇줄로 끝나는 내 초라한 이력서에 관악의 과객질은 가장 찬란한 기록이 될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어느 신문사의 食客 노릇을 했다. 과객이든 식객이든 객은 주인의 고마움에 인사를 치러야 하는데, 황망중에 슬쩍 떠나는 비레를 용서하기 바란다. 그 대신 강의실에서 맺었던 잠시잠시의 인연들을 소중히 간직하겠다. 이제껏 염치없이 남의 상만 받았으니, 나도 어서 내 상을 차려야 한다는 초조감이 앞선다. 사르트르를 '망할 녀석'쯤으로 그려놓은 폴 존슨의 책을 읽으면서, 사르트르의 생애를 점령한 '젊음'과 '좌파' 지향을 몹시 부러워하게 되었다.

 

 

 

Bonne chance a tous!

 

모두에게 행운을!

 

 

 

 

 

1994년 12월 21일

 

 

 

鄭雲暎

 

 

 

출처: 학회평론, 1994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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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진중권씨의 트위터(http://twitter.com/unheim) ]


트위터의 특성상,  짧은 단문으로 의미를 축약하여 작성된 글이긴하지만. 진중권씨가
말하고자하는 문제의식에 동감한다.

전근대근대, 그리고 탈근대.  현재 대한민국에서 여론이라 불리우는 다수대중의 인식의 지점.
그러니까 대한민국 구성원들의 집합의식이 위치한 곳은 위의 구분들중 어디 즈음일까... 
이땅의 전근대성에 대한 진중권씨의 지적은 상당히 유효하다.
그래서 진중권씨 같은 사람들이 이땅에는 많이 필요하다.

여담이지만...사실 이 사회에서, 90도 배꼽인사를 하면서, '많이 혼나겠다'고 사과해야 할 자들은,
여전히 고개를 빳빳히 들고 목에 힘을 준채 살아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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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신정환의 이름이 포털사이트를 도배하고 있다. 전반적인 분위기상 신정환은 중죄인이고, 그 기사아래 달린 댓글들도 공격적이다. '그렇게 살다 죽어버려라'라는 류의 감정섞인 독설들이 가득하다. 그가 사회적인 큰 해악을 끼친 인물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거기에 더해 언론은 그가 어디서 출몰했는지, 일거수 일투족을 세세히 보도한다. 잠적했다는 사람치곤 너무나도 그의 행적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황색 저널리즘의 기동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라고 할까...

   신정환은 카지노에서 도박을 했다고 하고. 카지노에서 도박을 한 행위는 그 자체로서는 불법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외국인만 출입가능한 카지노는 물론이고, 강원도 정선에 내국인들도 들어갈수 있는 카지노가 있다. 신정환은 도박을 해서 빚을 졌다. 처음에는 그 도박 빚때문에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어찌되었건, 신정환은 자신이 번 돈을 가지고 도박을 했고. 그 돈을 도박판에서 잃었다. 실제로 이 행위 자체는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는 아니다. 그 행위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신정환에게 돌아간다. 어찌보면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이다. 신정환의 도박 사건을 접한 우리는, 그의 개인적인 행위에 의해서 그 어떤 피해도 받지 않았다.

   다른 예를 한번 들어보자. 수년전 손지창씨 부부가 라스베가스 카지노에 가서 재미삼아 한게임했다가 잭팟을 터트렸던 이야기. 손지창씨 부부는 당시 아침 방송프로에 나와서, 이 훈훈한(?) 이야기들을 웃으며 이야기 했다. 물론 손지창씨 부부가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일회성 도박으로 벌어들인 돈이, 그 이야기를 관전하는 우리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준 것도 아니었다.

   신정환은 도박을 자주 즐겼고, 거기서 돈을 잃었다. 만약 그 과정에서 다른 이의 돈을 빌려서 갚지 않았다거나 그 사이에서 불법적인 일이 발생하였다면, 그건 그 개인이 법적인 처벌을 받으면 되는 문제이다. 손지창씨 부부는 미국여행중 방문한 라스베가스에서 일회성이건 아니건 간에 역시나 도박을 한 것이고, 거기서 잭팟을 터뜨리며 크게 한건 했다. 그리고 그 가족들끼리 그 돈(누군가가 그 카지노에서 눈물흘리며 잃어야 했던 돈일게다)을 나누어쓰며 행복해 했을 것이다.

   뭐, 예전엔 가끔 정권에서 대중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연예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다는 이야기가 돌았었다. 과거 정기적인(?) 타이밍을 가지고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대마초 파동, 그리고 굴비엮이듯 엮여서 줄줄이 잡혀들어가던 연예인들의 모습을 보도하는 언론.  뭐, 요즘 시대에 그런 유치한 전략전술을 기득권층에서 사용할 꺼라 생각치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그런 기득권의 알고리즘을 사회적으로 체득한 대한민국 민중들 같다. 요 얼마전까지 공적인 불법행위를 자행한 자들의 이야기가  떠들썩했다. 현대판 음서제도가 부활한게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사건들. 실제 그 행위들은 공적인 불법행위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밀착취재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언론기사는 본적이 없다. 물론 그 사건에 대한 분노도 터져나왔지만... 글쎄, 딴따라 신정환이 저지른 사건과 다르게, 펜대 굴리며 먹물냄새 풍기는 계층이 점잖게 저지른 위법행위여서 일까? 신정환 사건에서 접하게 되는 분노와는 느낌이 달랐다.

   사실 난 과거 2PM 재범군의 일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연예인으로 데뷔하기 이전, 철저히 사적인 공간에, 썼던 글로 그가 죄인처럼 단죄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집단 광기는 도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를 고민했었다. 과거 군사독재시절의 3S정책이 확고히 뿌리를 내린 것일까? 가쉽거리로 삼기 쉬운 연예인들의 사적인 영역에 우리는 공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단죄하고 흥분한다.  그러나... 정작... 사회적으로 큰 해악을 끼치는  진짜 범죄(?)에 대해선 비교적 너그럽다.  '너는 그 자리가면 그렇게 안하겠냐.' ,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있겠냐' 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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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블로그에 있던 글을 2018년 7월 11일 03시 37분에 옮겨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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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돌아오는 5월. 그리고 5월의 광주. 더이상 대학의 5월에선, 5.18을 느낄 수 없다. 몇몇 학생운동 활동가 후배들의, 힘겨운 몸짓은 보이지만, 그것도 더이상, 학생회 기반의 대중 정치 활동으로서 풀어내어 지고 있지는 못한 듯 보인다. 07년에 80년의 광주를 되새기는 건, 참 버거운 몸짓이었던 걸까…. 정말 80년 5월의 광주는 이제 우리의 머릿속에 '박제'화 된 기억일 뿐인 것일까.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이 대한민국에서 더이상 광주를 아픔으로써, 치열함으로써, 기억한다는 것은 이제 촌스러운 짓이 된 것일까.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이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학점,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토익과 토플 점수,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취업준비. 그렇다면 나는 어떤 위치에 서 있는 걸까.

 

민중진군 18년 5월 18일. 그로부터 10년이 흘렀고,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되물어본다.

'당신에게 있어서 광주는 무엇이었는가.'

 

 

 

80년 5월의 빛고을 광주.

그날을 기억하려는 자들과 그날에 대한 헛된 망발을 일삼는 자들의 공존.

그리고 대한민국 2007년.

  

정태춘씨의 노래 가사처럼.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 5.18 - 정태춘 & 박은옥 ]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거리에도 산비탈에도 너희집 마당가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엔 아직도 

칸나보다 봉숭아보다 더욱 붉은 저 꽃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그 꽃들 베어진날에 아아 빛나던 별들 

송정리 기지촌너머 스러지던 햇살에 

떠오르는 헬리콥터 날개 노을도 찢고 붉게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 소릴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앞에 그 훈장을 묻기전 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위에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동 언덕배기에 노여움으로 말하네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같은 주검과 훈장 

너희들의 무덤앞에 그 훈장을 묻기전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태극기아래 시신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절규하는 통곡 소릴 들었소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같은 주검과 훈장 

소년들의 무덤앞에 그 훈장을 묻기전 까지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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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한달여전, '우주의 죽음'에 대한 포스팅. 그리고 오늘 '5.18' 에 대한 포스팅. 블로그를 접어두고 있었지만, 오늘은 서투르고 다듬어지지 않은 글일지라도 꼭 남겨야했다. 자기반성이기도 하고, 다짐이기도 하고, 또 의무이기도 하다. 꼭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나를 이끌었으니까. 그렇게라도 내 머릿속을 많이 잠식한 망각의 영역을 조금은 줄이고 싶었다. 요즘들어 중요한것들을 망각해가면서 살아가고 있다하더라도,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 망각에 맞서, '잊고 싶지 않은것'들을 한번 일깨워보고 싶었다.



< 오월의 노래2 >

 

1.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2.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갔지

망월동에 부릎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3. 산 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랴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4. 대머리야 쪽바리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 

물러가라 우리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가슴에 붉은 피 솟네 붉은 피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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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방에서 선배들이 통키타 하나들고 목놓아 부르던 노래. 단조로운 행진곡풍의 곡조에 투박한 가사, 그러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던 노래. 9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여전히 정중앙에 놓여있었던... 모든 운동의 시작이었던 80년 5월의 빛고을 광주 - 5.18





어김없이 매년 5월 18일은 다가옵니다. 또 몇년째, 별생각없이 살아오다가 이날만되면 또 자뭇 진지지고 숙연해지는 가증스러운(?)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곤 합니다. 1980년 5월, 빛고을 광주에서 행해졌던 만행들속에서, 시민군 대오에 있다가 정말 처참하게 희생당한 분들과, 요즘들어 새로이 조명되고 있는 분들 - 징병제하의 대한민국에서 군에 입대했다가,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되어 크나큰 상처를 받고 결국 평생을 고통속에서 지내게 된, 80년 5월의 또다른 희생자들-의 고통스러운 모습들과 함께, 여전히 호위호식하고 있는 29만원짜리 연희동 대저택의 대머리가 떠오르니 여전히 80년 5월의 광주는 -ing 인듯만 합니다. 

 

광주시민들도, 또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사람들도, 질곡되고 일그러진 역사의 희생양인데, 정작 이런 상황을 만들고, 수많은 광주시민들의 피를 뿌리게 한 장본인들은 여전히 일말의 반성도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것 같습니다.

 

유영철에게는 분노하지만, 그보다 몇십배 몇백배의 학살을 저지른 대머리에게는 왜 관대하게 되는걸까요. 수많은 사람의 생을 앗아간 연쇄살인범 유영철은 죽일놈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는 현재 우선 사형선고를 받았고, 감형의 여지는 있으나, 근시일내에 '특사'라는 이름으로 출소할수 있을 가능성은 없어보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망자와 아직도 행적이 밝혀지지 않은 - 광주 어딘가에 암매장되었을 - 수많은 실종자들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전두환은, 노태우는 왜 그 엄중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특사'라는 이름으로 풀려나올수 있었던 것일까요. 홀리데이의 영화속에서 지강헌역을 맞았던 배우 이성재가 외쳤던(실제로도 지강헌이 그당시 사건현장에서 외쳤었던)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외침이 관철되었던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권무죄 무권유죄'처럼 말입니다. 전두환노태우에게 면죄부를 주려했었던 당시 검찰측의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수 없다.'는 말이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것 같습니다.

 

저에겐 서울대 79학번의 삼촌이 계십니다. 1979년 10월 26일, 한발의 총성으로 '그'가 사라져간 그날 이후, 수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가슴속에 민주화의 열망과 희망을 가슴에 품었던... '서울의 봄'이라 불리우는 80년 초반기를 대학교 2학년의 입장으로 겪으셨던 분이지요. 

 

삼촌께서 1998년 추석명절때 강원도 영월 할머니집 근방의, 동강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저에게 해주셨던 말씀들을 전 기억합니다.

 

"살아남은게, 죽어간 이들에게 죄스러웠다. 아무것도 하지못하고, 철저히 통제된 외딴 섬이었던 '광주'를, 마찬가지로 통제된 서울에서 바라보며 발만동동 구르고 있는 무기력한 나자신을 보는게 괴로웠다. 신군부가 정권을 잡기위해 군대를 동권하여 정권을 찬탈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고선 정국을 장악하는 과정속에서, 그것에 반대하며 '계엄령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구호를 외치며 저항했던 광주시민들을, 연일 TV에선 북한공산괴뢰집단의 사주를 받은 폭도라 매도했고, 계엄군들의 만행이 그렇듯 합리화 되는것을 보면서도 그 어떤것도 할수 없는 나자신이 원망스러웠다."

 

80년대 '전투적 학생운동'의 기풍의 시작은, 바로 80년 5월의 광주였습니다. 80년 5월의 학살을 기반으로 집권한 전두환정권과 그의 후계자 노태우정권을 '괴뢰정권'이라고, 정당성이 없는 정권이라고 규정했던 80년대, 90년대 초반 대학생들의 분노의 마음들이, 치열하고 전투적이었던 학생운동의 기풍을 만들어냈던거라 생각합니다.

 

정권을 잡기위해, 자기나라 국민을 총칼로 짓밟고 그것도 모라자, 그들을 간첩에 빨갱이로 매도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을 강화시킨 정권이 과연 제대로된 정권이었을까요. 80년 5월 빛고을 광주의 수많은 희생을 밟고 서서 정권을 잡았던 자들의 효과적인 정치선전 덕분에, (그래도 요즈음은 덜해지긴 했지만,) 과거 전라도 사람들은 각종 데마고기의 대상이 되었었습니다. 가해자는 떳떳했고, 피해자들은 계속해서 확인사살 당하며 보이지 않는 편견들을 감내해내야 했으니까말입니다.

 

(* 데마고기 ; 선동정치가가 특정한 문제에 대하여 정치적인 의도로 유포시키는 선동적 허위선전.)

 

ps/ 홍세화씨가 '악역을 맡은자의 슬픔'이라는 책에서 말했던것 처럼, 나또한도 이러한 포스팅을 하며 받게 될지도 모르는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는 질문에서 자유로울수 있는 나자신의 출생에 감사해야 하는걸까? 이런 불필요한 부연설명을 달고 있는 나의 자기검열이 슬프지만, 혹이나 있을지 모르는 의문에 미리 답을 해두자면, 내 아버지의 본적지는 강원도 영월이고, 내 어머니의 원 본적지는 경상북도 칠곡이며, 난 서울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 부산과 대전에 잠깐 살았던적이 있다고 하나, 그것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갓난아기시절의 일이고, 나는 서울이외의 곳에서 주거했던 기억이 없는 서울촌놈입니다.



80년 5월의 광주에 대한 저의 짧은 주절거림은 여기서 마치고, '강풀'님의 5.18 관련 작품으로 하고픈말들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강풀님께서 작년(2005년)에 발표하셨던 5.18에 대한 얘기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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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받쳐 충성을 다할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지금 혼자 중얼거려본 국기에 대한 맹세이다. 인터넷을 찾아보지 않았으므로, 몇몇 '단어'나 '조사'는 틀렸을 수 있겠지만, 얼추 저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얼마 전 국기에 대한 맹세를 폐지하자는, 기사를 보았었는데, 시험의 압박으로 읽지 못했고, 그 기사를 모티브로 해서, 포스팅을 한번 해보고자 한다.



1980년대 신촌의 창서초등학교.


교문에 들어서면, 꽃 화단 옆으로 난 길을 따라서 학교건물 쪽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그러기 전에 주번과 선생님이 서 있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등교하는 모든 학생은 '경건히'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저쪽 국기개양대위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이런 국기에 대한 맹세를 중얼중얼하며 읊어야 했다. 병장의 경례와 이등병의 경례가 틀리듯, 짬(?) 좀 되는 5, 6학년 학생들은 장난스레 나는 자랑스러운 으르르르르 아래래래래 굳게 맹세합니다. 이런 식으로 넘어갔던 걸로 기억하고, 짬 안되는 저학년들은 또박또박 그 국기에 대한 맹세의 의미와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 따위는 당연히 모른 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인 양 또박또박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읊었었다.


이 '국기에 대한 맹세'와 '황국신민서사'가 무척이나 닮아 있다는 것을 오늘에야 새삼 깨닫게 된다. 일각에서는 근대화의 아버지라 칭송받는 박정희라는 사람의 친일경력을 굳이 여기서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박정희라는 사람에게 있어서, 일제 시절의 삶에 대한 흔적들은 분명히 남아있었고, 그것이 의식적이고 의도적이었건, 아니면 무의식적이고 의도적이지 않았건 간에,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과격한 맹세문은 분명 닛폰 제국주의의 '황국신민서사'가 무척이나 닮아 있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정말 말이나 되나? 초등학생 그 코흘리개들이, 국기를 바라보며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있는 그 무시무시하고 험한 광경이…. (짐작건대 박정희라는 인물은 황국신민서사에서 참 큰 감명을 받았던 걸로 추정된다)


이번에 나온 그 기사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해서, 국기에 대한 맹세에 대한 이슈가 생겼던 이유가 뭔지 잘 모르겠다. 논란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국기에 대한 맹세를 폐지하는 것을 반대하는 무리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을 반대할 논거로 무엇을 내세웠는지 심히 궁금해진다. 도대체 왜 반대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에 반대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 글 쓰고 한번 기사를 찾아 읽어봐야겠다.


중학교 들어가면서, 업그레이드된 학생으로서의 격에 맞게(?)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던 나는, 당시 별생각 없이 '이 땅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되 내어지기를 강요받았던 존재였다. 물론 그 당시도 그 의미를 알지는 못했다. 정말 글은 보되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까막눈이었던 게지. 일례로는 고3 때, 왼손을 발달시켜보겠다며, 국민교육헌장을 왼손으로 개발새발 써가며 뿌듯해 했던 기억도 가지고 있다. -_-;;; 실제 나란 존재는 부모님의 강렬한 사랑에의 열망으로 태어난 것인데 말이다. 결국, 국기에 대한 맹세니 국민교육헌장이니 하는 그런 선언적인 문구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국가주의'라는 것인데, 나 또 한도 왠간히 세뇌교육을 뼛속 깊이 간직한 존재라 국가주의라는 것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에 대해 '왜?'라는 의문은 가져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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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초중고등학교의 교육현장에서 대놓고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우는 일은 이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국민학생'이었던, 80년대를 돌아보자면, 적어도 나는 반공으로 아주 덕지덕지 점철된 시간을 보내왔던 것 같다. 물론 나보다 더 연배가 높으신 분들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반공글짓기, 반공웅변대회, 반공포스터, 반공스크랩, 반공표어 등등등.


이렇게 말하면 과연 이 인간 나이가 몇이야?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나이는 그리 많지 않다. 78년생. 전두환과 노태우를 '국민학생'시절 접했던 새파랗게 젊은 20대.


내가 다녔었던 초등학교가 신촌에 있는, 쉽게 말해서 전두환의 본진과 앞마당(노태우의 집) 근접해있었던 곳이라 그런 게 더 심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전남 목포에서 '국민학생'시절을 보냈던 나의 여자친구님께서는 내가 받았던 반공교육들을 말하자면, "거짓말. 말도 안 돼. 뻥까지마." 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시곤 하시지. 물론 그녀도 나랑 동갑내기.


그냥 그때 그 시절을 돌이켜보다가, 머릿속을 문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당시 나름대로 신동 소리 들으면서 잘나갔던 시절이라(뭐 국민학교때 잘나가지 않았던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마는) 여러 가지 상들을 쓸어모았었기에, 혹 상장 같은 것으로 그런 흔적들이 남아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20여 년 전의 흔적과 증거자료들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었다. 물론 세월이 워낙 오래 지난 지라, 많은 자료가 유실된 상태였고, 그나마 몇 가지 증거물을 찾아내는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투....투철한 애국정신이라니~!!! 도대체 애들 데리고, 이게 뭐하는 짓이었는지.


과연 국민학교 2학년짜리 '어린이'가 도대체 어떤 '투철한 애국정신'을 발휘하였기에 타의 모범이 되었던 것일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국민학교 2학년짜리 코흘리개에게도 6월 25일 보훈의 달 행사에서 투철한 애국정신을 요구했던 제5공화국 전두환과 대한민국이 있었다는 것. 한가지 또 기억나는 건, 그때 나와 내 친구들이 흥얼거렸던 노래.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6.25의 노래.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노래를 중얼거리는 국민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마치 지금 우리가 북한의 꼬마 아이들이 등장하는 선전용 영상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반공독후감. 국민학교 2학년 시절의 나는 도대체 어떤 글을 써내려갔던 것일까.


국민학교 4학년때는 반공글짓기까지 섭렵 !!!


반공교육은 노태우 정권 들어서도 여전히 이어졌다는 명백한 증거. 물론 그 당시의 나는 노태우 대통령님을 참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었고, 그것은 당시 민족민주운동진영과 재야의 이미지 정치의 실패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반공이데올로기'의 효과적 선전의 측면도 부인할 수 없을 듯.



다행히(?) 그림 그리는 데는 재능이 전혀 없었기에, 반공 포스터 같은 미술 관련 상장들은 없고, 또 어린 시절에는 목소리가 크지 않았던 꼬마였기에 반공 웅변대회의 상장도 없다. 그러나 내 아련한 기억 속에는 반공의 기치를 '이 연사 소리높여 외쳤'던 그때 그 시절 반공 웅변대회와 친구들의 기억이 존재한다.


반공. 이제 조금은 흐릿해져 가는 코드일 수도 있겠다. 물론, '반공'이란 정서가 이 땅에서 완전히 일소되었다 평가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94년 한국통신 노조의 파업을 '반공'이데올로기로 몰아붙이며,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식의 탄압이 가능했던 시대보다는 진일보한 것이겠다. (물론 노조의 파업을 짓밟는데 선봉대장이었던 '반공'을 대신해, '집단이기주의'니 '귀족노조'니 하는 말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생각해보면 감히 일개 방송사의 PD수첩이 황우석 교수를 검증했다고 길길이 날뛰셨던 분들께선 고개를 돌려 97년 말을 떠올려보시면 좋겠다. 그때 조갑제 같은 극우 인사를 필두로 한 극우세력들과 한국논단(이라는 별시덥잖은 극우 잡지)이 대통령 후보들의 '사상을 검증'하겠다며 메이저 방송사에서 사상검증의 굿판을 벌이기도 했던것을 기억하시나? 물론 그들이 검증하려 했던 건 이회창도 아니었고, 이인제도 아니었고. 바로 한 사람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그 20세기 말에 펼쳐진 쪽팔린 사상검증의 굿판의 중심에는 '반공'이 있었다. 딱 까놓고 이놈이 '빨갱이'인지 아닌지를 검증하자는 것이었고, 실상은 그 사상검증토론회를 통해, 그해 대선에 임하는 김대중에게 뭔가 미심쩍은 그런 혐의를 알게 모르게 풍김으로써, 과거 박정희가 그랬던 것 처럼 그런 식으로 선거전에서의 승리를 꿈꾸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기억 못 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당시 97년 대선투표일 자정. 그러니까 투표개시를 6시간 정도 앞둔 그 야밤에, 한나라당의 대변인 논평은 정말 가관이었다. 배경의 CG로 남한의 모습에서 점차 붉은색으로 변하는 그래픽을 내보내면서, '과연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이 나라를 맡기시겠습니까.'라는 대변인의 논평. 이게 정말 97년 말에 일어날법한 일인지 한탄했던 기억이 난다. (조선일보의 만행들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고) 그해 대선에서는 이 땅에서 또 하나의 민감한 화두 중 하나인 병역문제에 이회창 후보가 태클 걸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땅 민중들의 의식이 반공이데올로기의 자극 따위는 이미 초월한 의식 수준을 가졌기 때문인지. 어쨌든 야당후보였던 김대중 후보가 당선이 됐었다.


반공에의 추억. 그 치열했던 80년대를,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온몸으로 항거하며 죽어갔었던 그때 그 시절을, '하늘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임승차했던 나에게도 그 어린 나에게도 '반공'에의 추억은 살포시 남아있다. 똘이장군과 함께. 이승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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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은 자기 스스로를 '개혁적 마초' 라 지칭했다. 화들짝 놀랠 사람도 있겠지만, 원래 우리나라에서 어떤 이념이나 사상적 스펙트럼이라는 게 원래의 기준과는 좀 달라지게 된다. 내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세히 뜯어보면 모더니스트에, 자본주의자가 존재하는 만큼 공산주의자도 존재하고, 공산당도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럴 때 만이 사회가 건강하다고 믿는 얼치기 중도 정도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진 내가, 좌파 취급을 받거나, 술김에 미친 척 좌파행세를 할 수도 있는 건 우리 사회에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자신의 것을 놓지 않고, 자신의 소유에 집착하는 좌파가 어디 가당키나 하겠나? '국가보안법 폐지 찬성 = 좌파' 류의 등식이 공식적으로는 아니나, 암묵적으로 통할 수 있는 사회이고, 또 주류기득권의 이데올로기와 대립 선상에 있는 생각들을 가진 사람을 좌파라 칭할 때는 얼추 들어맞는 말일 수도 있으나, 내가 생각하는 '좌파'의 상과는 좀 다르다는 얘기. 흠... 얘기가 좀 따른 데로 새버렸는데... 

 

신해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신해철이 말하는 부분들은 사실 굉장히 '상식적'인 부분들인데, 우리나라 사회에서 받아들여 지기에는 '뼛속까지 페미니스트'라고 손가락질 받기 딱 맞다. 굳이 따지고 보면 굉장히 상식선에서의 얘기들인데 말이다. 스스로 나 자신을 평가해보건데, 여성 문제에 대한 나의 성향도를 까발려보자면 나 또한 얼추 '개혁적 마초' 정도의 위치에 설 것 같다. 상식선에서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며, 서로 웃고 사랑하며 즐겁게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 어떠한 이유로도 그 사람이 처한 위치나 타고난 불변의 무언가로 인해 착취를 당하지 않는 것. 그게 내가 바라는 사회의 모습일 게다.

 

신해철... 아니 N.EX.T의 5집이라 불러야 하나? 하여간 그 앨범은 CD2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장의 컨셉은 굉장히 사회문제에 대한 직접적 개입이 두드러져 보인다. 상당히 마음에 드는 앨범. '사탄의 신부'라는 노래, 정확한 전문용어는 알 수 없으나 아주 하드하거나 매니아틱한 음악이 귀에 익지 않는 나 같은, Normal 귀가 들었을 때, 좋다고 느껴졌던 노래. 물론, 음악 자체보다도 '가사' 같은 것에 의미를 두는 내 성향상, 좋게 들린 것일 수도 있다.

 

아래 파란박스 안의 글은, 각 곡마다 신해철이 자신의 노래들에 만드는 음악적 과정과 그 곡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써놓았는데, 그중 '사탄의 신부'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써놓은 부분이다.


나는 사탄인 뱀이 에덴에서 이브를 유혹한 것은 이브가 도덕적으로 취약해서가 아니라 띨띨한 남성인 "아담과 얘기해 봐야 눈앞이 캄캄해서" 였다고 믿는다. 이브의 덕으로 우리 인류는 책임없는 안전, 진보없는 행복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유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제 유혹자는 다시 한번 노래를 부른다. '현모양처 같은 X까는 소리 하지말고 너자신의 삶을 살아라.' 해서, 이 여왕은 '눈물의 여왕'이며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 고난과 시련이란 이름의 마차에 올라야 한다. '다크 신데렐라'라고나 할까.

 

나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여성들이 경제적 자립을 손에 넣지 않고서는 남녀평등이란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니까 전업주부란 위대한 직업임을 알면서도, 그 자체의 경제력과 생산성을 인정하면서도, 여중생이 만면에 웃음을 띄며 장래희망에 현모양처라고 적을때, 확 다 불 싸질러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곤 한다. 오늘도 미스 김에게 커피를 부탁하는 조 대리의 얼굴에 커피잔을 던저버리고 싶어하는 많은 미스 김들에게 이노래를 드린다.






[사탄의 신부 / < N.EX.T 5 - The Return Of N.EX.T Part III > ]






어둠보다 더 검은 눈을 가진 소녀여

이제 작은 손을 내밀어 너의 운명을 잡아라

단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전부 너의 것이 되리라 이 모든 세상이

 

너의 흘린 눈물은 보석이 되고

남 몰래 숨긴 한숨은 노래가 되며

지나간 아픈 시간은 꿈이 되리라

아침해가 떠오르기 전에

 

*

wake up, my queen 한 겨울의 여왕이여

now arise, my queen 자신의 주인이여

고난과 시련이란 이름의 마차를 타고

폭풍 이는 벌판 위에 영원히 피어나라

 

wake up, my queen 첫 눈물의 여왕이여

now arise, my queen 운명의 주인이여

너 홀로 의지의 배를 타고 내게로 오라

이 영겁의 고독에서 몸부림치는

날 구해다오

 

dear my queen, out from the screen

dream on forever

dear my queen, twisted heroine

shine on forever, and ever and ever

 

 

너 자신조차도 미처 알지 못하던

네 깊은 곳에 숨겨진 너를 찾아내야 해

 

너의 바램은 나의 소원이 되고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리

소녀여 이제 일어나 나에게 오라

아침해가 떠오르기 전에

 

wake up, my queen 한 겨울의 여왕이여

now arise, my queen 자신의 주인이여

고난과 시련이란 이름의 마차를 타고

폭풍 이는 벌판 위에 영원히 피어나라

 

wake up, my queen 첫 눈물의 여왕이여

now arise, my queen 운명의 주인이여

너 홀로 의지의 배를 타고 내게로 오라

이 영겁의 고독에서 몸부림치는

날 구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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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를 언제 처음 접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이노래를 처음 들었을때, 내눈엔 눈물이 흘렀던거 같다. 추석때, 영월 할머니집으로 향하던 삼촌과의 동행길. 그 차안에서, 이노래를 틀었을때, 삼촌이 나에게 말씀하셨었다. 삼촌께서도 이노래를 처음듣고 눈물을 흘리셨었다고. 대학2학년 때였나... 동강 강변에 포장마차에서, 삼촌에게 학생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을때, 그 어린 조카에게 '20년을 기다렸다'고 말씀하시며, 소줏잔을 기울이셨던 삼촌은, 지금도 나에겐 참 멋진 분이시다.(난 78년생. 삼촌은 79학번)

 

대학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것은 철거촌에서의 경험이었다. 처음 방패를든 전경(실제로는 의경이겠지)들에게 쫓겨본것도 대학 1학년 3월달, 동대문구에 있었던 철거촌이었으며, 세상이 내가 생각하던대로 아름답지만않다는 것을 깨달았던것도 철거촌이었다. 용역깡패들에 의해서, 70넘게 나이드신 할아버님이 온몸의 뼈가 수십군데 부러지시고, 27살의 어떤 형님은 깡패들에게 잡혀서, 깡패들이 만들었던 사제 화염방사기같은 물건에 의해서, 온몸에 중증화상을 입으시고 온몸이 형체를 알아볼수도 없을만큼 화상을 입으셨던 그때. 온갖 연예인의 시시콜콜한 얘기들도 뉴스에서 까지 주절거리는 언론이, 그 철거촌에서의 치열한 싸움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것을 보면서, 눈으로, 몸으로... 이 세상이 반드시 정의롭지는 않을수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깨달음들을 배울수 있었다,아주 강렬한 느낌으로. 마치 79년 19살 까까머리의 삼촌이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세상이 꺼꾸로 뒤짚히는 느낌이었다는 것처럼.

 

이 노래의 배경이 되었던, 그 아이들의 죽음... 그 죽음에 대한 다큐를 대학에서 '여성학' 수업을 들으면서 다큐로 본적이 있었다. 그때 정태춘씨는 이노래를 통기타 하나를 들고, 아이들의 장례식장에서 특유의 구슬픈 목소리로 불렀었던걸로 기억한다.

 

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흘릴수 있었던, 나를 잃고 싶지 않다. 현실속에 무감각해지며, 그져 당연스러운 불가피한 세상사로... 이런일들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려면,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하겠지. 내가 보수적인 입장에서 진보적인 눈빛을 가지는데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지만, 다시 보수적인 눈빛으로 회귀하는데는 그 어떤 노력도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무관심', '내앞가름하기에도 정신없는 삶을 살고 있다'라는 몇마디 변명이면 충분하니까...




[ 우리들의 죽음 - 정태춘 ]





맞벌이 영세 서민 부부가 방문을 잠그고 일은 나간 사이, 

지하 셋방에서 불이나 방안에서 놀던 어린 자녀들이 밖으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질식해 숨졌다.

불이 났을 때 아버지 권씨는 경기도 부천의 직장으로, 

어머니 이씨는 합정동으로 파출부 일을 나가 있었으며, 

아이들이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방문을 밖에서 자물쇠로 잠그고, 

바깥 현관문도 잠가 둔 상태였다. 

연락을 받은 이씨가 달려와 문을 열었을 때, 다섯 살 혜영양은 방 바닥에 엎드린 채,

세 살 영철군은 옷더미 속에 코를 묻은 채 숨져 있었다. 

두 어린이가 숨진 방은 3평 크기로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와 

비키니 옷장 등 가구류가 타다만 성냥과 함께 불에 그을려 있었다. 

이들 부부는 충남 계룡면 금대2리에서 논 900평에 농사를 짓다가 가난에 못이겨 

지난 88년 서울로 올라 왔으며, 지난해 10월 현재의 지하방을 

전세 4백만원에 얻어 살아왔다. 

어머니 이씨는 경찰에서 '평소 파출부로 나가면서 부엌에는 부엌칼과 

연탄불이 있어 위험스럽고, 밖으로 나가면 길을 잃거나 유괴라도 당할 것 같아 

방문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평소 이씨는 아이들이 먹을 점심상과 요강을 준비해 놓고 나가 일해 왔다고 말했다. 

이들이 사는 주택에는 모두 6개의 지하방이 있으며, 각각 독립구조로 돼 있다.


 

젊은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도 돈 벌러 파출부 나가고

지하실 단칸방엔 어린 우리 둘이서 

아침 햇살 드는 높은 창문 아래 앉아

방문은 밖으로 자물쇠 잠겨있고

윗목에는 싸늘한 밥상과 요강이

엄마, 아빠가 돌아올 밤까지

우린 심심해도 할게 없었네

낮엔 테레비도 안 하고 우린 켤 줄도 몰라

밤에 보는 테레비도 남의 나라 세상

엄마, 아빠는 한 번도 안나와 

우리 집도, 우리 동네도 안나와

조그만 창문의 햇볕도 스러지고

우린 종일 누워 천장만 바라보다

잠이 들다 깨다 꿈인지도 모르게

또 성냥불 장난을 했었어

 

배가 고프기도 전에 밥은 다 먹어치우고

오줌이 안 마려운데도 요강으로

우린 그런 것밖엔 또 할 게 없었네

동생은 아직 말을 잘 못하니까

후미진 계단엔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고,

도둑이라도 강도라도 말야

옆방에는 누가 사는지도 몰라,

어쩌면 거긴 낭떠러지인지도 몰라

 

성냥불은 그만 내 옷에 옮겨 붙고

내 눈썹, 내 머리카락도 태우고

여기 저기 옮겨 붙고 훨, 훨 타올라 

우리 놀란 가슴 두 눈에도 훨, 훨


 

"엄마, 아빠! 우리가 그렇게 놀랐을 때

엄마, 아빠가 우리와 함께 거기 있었다면..."


 

방문은 꼭 꼭 잠겨서 안 열리고 

하얀 연기는 방 안에 꽉 차고

우린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만 흘렸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우린 그렇게 죽었어

그 때 엄마, 아빠가 거기 함께 있었다면...

아니, 엄마만이라도 함께만 있었다면...

아니, 우리가 방 안의 연기와 불길 속에서

부둥켜 안고 떨기 전에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기 전에

손톱에서 피가 나게 방 바닥을 긁어대기 전에,

그러다가 동생이 먼저 숨이 막혀 어푸러지기 전에,

그 때, 엄마, 아빠가 거기에 함께만 있었다면...

아니야, 우리가 어느 날 도망치듯 빠져 나온

시골의 고향 마을에서도

우리 네 식구 단란하게 살아 갈 수만 있었다면...

아니, 여기가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축복을 내리는 그런 나라였다면...

아니, 여기가 엄마, 아빠도 주인인 

그런 세상이었다면...

엄마, 아빠! 너무 슬퍼하지 마

이건 엄마, 아빠의 잘못이 아냐

여기 불에 그을린 옷자락의 작은 몸둥이.

몸둥이를 두고 떠나지만

엄마, 아빠! 우린 이제 천사가 되어 

하늘 나라로 가는 거야

그런데 그 천사들은 이렇게 슬픈 세상에는

다시 내려 올 수가 없어

언젠가 우리 다시 하늘 나라에서 만나겠지

엄마, 아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운 가장 예쁜 말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이제,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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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박사 논란' 으로 한창 시끌시끌하다. 양 극단의 사람들은

서로 첨예하게 대립의 각을 세우고 있고... 난 그걸 방안에 앉아

그럭저럭 쓸만한 노트북 LCD를 통해 바라보고 있다.

 

낯짝이 두껍던지, 아니면 지식과 신념의 폭이 두텁던지.

그 두가지가 아니라면, 사회현상을 바라보며 뭐라고 한마디의 

글을 쓰는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세상사 왜이리 복잡하냐. -_-;;;

한가지의 '실체'를 놓고, 각자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대상을 바라보며 잉태되는 각각의 '진실'들.

 

그 모두다 '진실'이라고 말하기도 참으로 꺼림찍한것이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쪽만을 가리켜 '확고한 진실'이라고 쾅쾅쾅

판결내리기도 어려운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된다.

 

마치 사회를 바라보는 '기능론적 관점'과 '갈등론적 관점'

을 놓고, 내가 반드시 양자택일(중간은없이)을 해야하는 

상황속에서 "당신은 어느편에 서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때

그때의 고민과도 같겠다. 

 

지식과 신념의 폭을 두텁게 하는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낯짝재질의 보강을통해, 낯짝의 두껍화를 이루는게 

모든 고민해결의 가장 빠른 길 인건가...



P. 브뤼겔 그림 《바벨탑》, 빈미술사박물관소장

↑《구약성서》 <창세기>에 기록된 벽돌로 된 높은 탑. 인류는 노아의 대홍수 뒤에 시날(바빌로니아)의 땅에 벽돌을 가지고 마을과 탑을 세워,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려고 했다. 하느님은 이것을 보고, 그때까지 하나였던 인류의 언어를 혼란시켜 인간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도록 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인에서 발췌)




난 기독교인이 아니기에, 이 내용에 대한 정통적 성경해석은 모른다.

아니 아예 모른다기보단, 건너건너 들어서, 대충 수박겉핥기식으로 알고는 있다.

다만 요즘 이런저런 일들을 접하면서, 여기 나와있던 "하나였던 인류의 언어"를 

혼란시켜서, "인간이 서로 의사소통할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대목이, 인상깊게 다가온다. 

후...그럼 하느님은 심술쟁이? -_-;;; 어쨌거나 성경그대로라면, 오만방자했던

인간을 벌하려고 하느님이 심술부려주신덕분에, 지금 현재도 인간은 의사소통을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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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페미니즘 하면 떠오르는게 무엇인가 ???

혹이라도 '꼴통페미'니, '조리뽕사건'이니 하는것을 

떠올리고 있는지는 않은지...

 

나에게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8년전 대학생이 된 그 시간들 이후...

그러니까, 학생사회에 들어선 이후, 또하나의 "해방의 담론"이었다.

가끔 나는 이 사회에서 페미니즘이라는것에 대한 의견들을 지켜보자면,

과거 '빨갱이'라는 식의 지칭과 비슷한 감정적 대응들을 접하게 된다.

페미니즘이라는 화두에 

조리뽕사건, 혹은 테트리스 사건같은, 여성운동하는 사람들도 모르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여성운동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문제제기 된줄알고 있는,

그런 수많은 오해속에서, '꼴통페미'라는 말로 대표되는 많은 사람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의 수준은, 이미 그 출발부터 '부정적 감정'을 담고 있다.

 

그런 반응들을 볼때, 솔직히 나는 상당히 자기중심적이고 재수없는 반응이긴하지만,

"책 몇권 더 읽고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재수없나? 그럴수도 있겠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대한 '몰이해'가 극단적인 반페미니즘적 반응으로 

연결되는 것을 경험하고 보아온 나로서는 (상당히 재수없는 대응이

긴 하지만) 페미니즘을 "전해듣는"것이 아닌 "직접 읽어볼것"을 권유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마르크스에 대해선 책한줄 읽어본적없고, 그가 직접쓴글 한줄

읽어본적 없으면서, 2-3시간짜리 사쿠라 강좌듣고 와서는,(사실 그정도라도 들었으면 

양반이다.) "마르크스는 실패했다."고 주저리는 사람들을 볼때 드는 감정과

비슷한 감정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하루벌어먹고 살기도 힘든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게 아니다. 그분들에게 페미니즘이니 마르크스니 하는건 부담스러운 사치이겠지.

내가 대상으로 하려는건 알려고 하면 충분히 알수 있고, 충분히 어떤인식의 기반을

가질수 있는...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리자면 쁘띠부르주아계층들...

쉽게 말하자면 나같은 계층들을 대상으로 한다.

 

제발 생리대에 대한 특소세 문제 나왔을때, 4드론 러쉬하는 저글링 개떼들처럼 달려들어

오바떨지좀 말자. 어차피 우리는 어머니, 혹은 여동생. 누나.

그리고 와이프. 그리고 훗날 우리의 딸들과 함께 공동경제 책임지며 살아가는것 아닌가...

국가에 의한 세금부담줄어들면 국민갱제에 도움될텐데, 그걸가지고 남성에게는 

그런혜택없다는니...면도기도 세금혜택주자느니(남성의 수염과 여성의 월경은 내가 생각하기에

동등한 위치에 있는 개념이 아닌것 같다) 하는 말로 우선 삐딱선부터 타고보진 말자.

물론 그렇지 않는 분들이 훨씬 더 다수라는 믿음은 가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어떤 저항세력 혹은 어떤 대안의 담론들이 제출되었을때,

우선은 그것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먼저 뒤따르고 있음은 사실같다.

우리나라처럼 20세기출발자체부터 중반까지 우리의 뜻에 의하지 않고

'그들'에 의해서 제대로된 저항도 못한채 무기력함속에서 강간당한 질곡의

근현대사를 가진 나라에서... 그리고선,이어진 야만적인 전쟁의 상처들.

그리고 고착된 분단, 반공과 그에 이어지는 승공 그리고 멸공.

거기에다가 그것에 대한 총체적 평가는 분분하지만, 그것이 "개발독재"였다는것은

대부분 동의하는 나머지 반세기를 살아온 우리나라에서

서로와 서로의 의견을 인정한채 벌이는 토론과 논쟁의 문화는 

어쩌면 너무나도 크나큰 기대일수도 있겠다.

지금이야 민주노총이라는 글자가 수능에도 출제되지만

(본인...2006학년도 수능시험지를 훑어보다가, 근현대사의 문제보기중에

민주노총이라는 글자를 접하고 격세지감을 느꼈다. 민주노총이 합법화된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김대중정권이전에는 불법단체였지.)

불과 10여년전 그러니까 문민정부 김영삼정권시절에도,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파업은,

배후에 북한이 있다는 그런 색깔론의 공세속에서 무너져야 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척박한 토양속에서 그러한 상황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생각하기에, 페미니즘이라는것도 그러한 선상에 있는것 같다.

우리사회에서 호주제위헌판결이라는것을 이끌어낸것은,

사실, 2005년 몇몇 '꼴통페미'의 발칙한 도발에 의해 한순간에 이루어진게 아니라...

이미 반세기 넘게 이어저온 싸움이 이제서야 약간의 결실을 도출한것이리라...

 

서로서로 평등한 사회. 서로서로가 스스로 본의 아니게,

소위 사회의 관습이나 다수의 의견이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힘들게 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그길에 "페미니즘"이라는 화두는, 거친 수풀을 헤쳐가는

중요한 수단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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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씨의 책을 접한이후로, 8년정도의 시간동안. 다음카페나 각종사이트에서의 

내 닉네임은 '똘레랑스21'이었다. 물론 올한해 늦깎이 수능공부를 하면서 몇몇 닉네임은 

'거위의꿈'으로 수정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확실한건 '똘레랑스'란 말은 내스스로에게 굉장히 매력적인 말이었고, 

운동을 고민함에 있어서 중요한 태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똘레랑스'라는 개념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는 해본적이 없었다.

 

오늘 현천군의 포스팅을 보면서, 갑작스레 '똘레랑스'라는 그 아름다운 가치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에의 욕구가 가슴속에 꿈틀거리는것을 확인한 나는,

오후에 도서관에가서 책을 빌리면서 '똘레랑스'라는 책을 집어들었다.

 

'똘레랑스' 책의 프롤로그 맨 첫장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있다.

 

『 인류는 "자신의 견해 또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와 행동양식에 

거스르는 일을 편견없이 끈기 있게 참아내는" 일을 의미하는 

관용(똘레랑스)의 미덕에 이르기까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 책을 통해, 똘레랑스 라는 다소 추상적 개념에 대한 진지한 고민속에서,

구체적인 표상을 도출해내는 작업을 미약하게나마 내스스로 진행해보고 싶다.

'추상'에서 나아가 '구체'로 다가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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