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일.  [우리집 고양이들을 소개합니다 - 프롤로그]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했었다. 그리고 지금 2021년 8월. 그 사이 4마리의 냐옹이들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우리집 고양이들을 소개합니다.'라는 블로그 포스팅 연재 프로젝트에 소개되어야 했던 아이들을 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셈이다.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어진 것은 나의 나태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글을 쓰고 얼마 되지 않아 베티가 투병을 시작했고, 한 달가량 지났을 때 베티가 떠나갔다. 이어 찌롱이의 유선종양 진단과 수술. 얼마 후 암의 전이, 재발. 그리고 몇 개월 동안의 긴 투병. 그리고 찌롱이와의 이별.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많이 지쳐갔고, 전의를 상실했다.

내 블로그에 비공개 상태로 남아있는 이별의 흔적들.




그로부터 거의 2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코비가 떠났고, 얼마 전에는 초롱이가 떠나갔다. 내 블로그에는 완성되지 않은 채 비공개 상태로 남아있는 이별의 메시지들이 계속해서 쌓여가고 있다. 떠나간 아이들에 대한 기록도 모두 복원해야 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기록에 앞서, 生의 기록들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첫 발걸음은 바로 우리집 고양이들을 소개하는 글들일 것이다.  이제 가장 어린 냥이들이 11살이다. 말 그대로 '묘르신'공화국.  서른마리가 훌쩍 넘었던 거대한 대제국이 부흥의 전성기를 지나, 이제 조금씩 저물어가는 느낌이다. 현재 우리와 함께하는 냥이들은 스물한 마리. 냥이들이 더 떠나가기 전에, 삶의 기록, 생의 기록을 조금씩이나마 남겨야겠다.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의 삶의 동반자인냐옹이들에 대한 기록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2019년 12월 9일. 별이 된 베티.
2020년 8월 2일. 별이 된 찌롱이.
2021년 6월 17일. 별이 된 코비.
2021년 8월 10일. 별이 된 초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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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내 아이.   그가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초유의 사태인 코로나 정국으로 인해 미루고 미루어졌던 첫 등교.

2020년 5월 27일.  오늘 아이는.

인생의 또 하나의 관문을 열어 젖히며, 인생의 새로운 여정에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 설렘 가득 담긴 첫 발걸음을 내딛는 그대에게...

아빠는, 그 첫 순간의 사진을 담아 미래의 그에게 선물하려고 한다. 







[[  보너스(?) 사진 - 2017년 3월. 첫 등원을 하던 아이의 모습 / 격세지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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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우리 고양이를 소개합니다.'라는  소소한 블로그 포스팅 프로젝트를 진행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함께 하는 아이들에 대한 기록. 그러나...;;; 집이 셀프 리모델링 작업을 시작하려고 벽지를 제거하고, 몰딩들 제거하고, 거의 전쟁터 수준이라. 사진 찍을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시작해야겠다고 미루고 미루어온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리고 오늘, '딸기'가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2019 11 1 금요일 13 37. 딸기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나갔다.  화요일 병원에 입원시킬 ,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예상치 못했던 이별이다.

 

 

 

 

 

우리 고양이를 소개합니다.프로젝트를 미루고 미루어온 까닭에, 딸기를 소개할 기회를 잃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계속해서 미루기만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시작을 하기 위해서, 그 서막()을 선포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렇게 급하게 후다닥 글을 쓴다.

 

함께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을 기록하고, 또... 먼저 떠나가 별이 된 아이들에 대한 기록도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집 고양이를 소개합니다.' 프로젝트 안에서 진행할 생각이다. 늘 곁에 있었기에, 그 소중함을 잊고 살아가다가, 그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의 '부재' 상황을 맞이하고 나서야, 이렇듯 가슴 아파한다.  그 소중한 존재들을 기록해야겠다.  시간이 지나가면 기억은 희미해지고,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것은 '기록'일게다. 기록하자.  기록함으로써 기억이 살아남을 수 있다. 

 

벌써부터 희미해진 기억의 연결고리를 잇는 작업을, 이번 프로젝트 기간 내내 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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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돌베개 출판사에서 음악평론가 강헌이 쓴 『신해철 In Memory of 申海澈 1968-2014』를 출간하면서텀블벅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고 





당연히  텀블벅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강헌 선생님이  '신해철' 관한 책이라는  자체만으로도구매의 이유는 충분했고거기다가  텀블벅 프로젝트에 참여할  제공되는 각종 리워드가 모두  매력적이었기에.



그리고 3개월가량의 묻지마 기다림물론프로젝트 진행에예정된 날짜들은 있었다그냥 별생각 없이 기다렸다는 의미.  어제 오후드디어 택배가 도착했다이런 류의 포스팅은, 몇 마디 말보다는 사진이다



저자 친필 사인본은 진작 받아보았고후원자 이름이 게재된 신해철 JUKEBOX뮤지컬 <THE HERO> 대본집 특별판도 기대가 되었지만가장 기대했던 것은역시나 한정판 오르골이었다아날로그적 감성 물씬 풍기는 오르골. '일상으로의 초대' 라는 곡을 떠올리면, 1998 열정적이었던 그때 그시절 시공간의 향취까지  가슴에 떠오른다.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게 믿기지 않는다내가 40대에 접어들었다는 것도…  마왕이  세상에 없다는 것도… 모두다 믿기지 않는다.  하아…이런저런 생각들. 추억과 향수. 상념들이 고개를 든다.  어서 자야겠다. 



오르골 태엽을 감고카메라를 들고 손각대로 동영상을 찍었다다음부터 동영상은 왠만하면 삼각대를 써야겠... -_-;;;





본가, 어느 박스 안에 챙겨져 있을, 솔로 앨범들과 넥스트 시절 테이프들 말고는, 모두 다 챙겨와서, 책장 한 칸을 마왕을 위해 꾸며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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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를 자발적인 육아휴직 기간으로 정하고, 성현이를 위해 집중적으로 나의 시간을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랬지만 실상 내가 성현이에게 일상을 벗어난 색다른 경험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느껴왔다. 


어제 따스한 봄바람을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문득 든 생각. ‘한강에 가자 !!!’


성현이를 데리고 한강에 온 적은 있었으나, 그건 성현이가 걷지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성현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 우리 부부가 바람 쐬러 왔던 거였지, 성현이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나들이는 성현이를 위한 시간이 되게 하리라. 


나 : “성현아! 한강에 갈까? 한강에 가자! 한강이 뭔지 알아?”

성현이 : “한강. 가자.”


내 말을 따라 하는 성현이, 그러나 한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때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 동네 공원 산책에서 좀 벗어나 차를 타고 한강공원 망원지구로 왔다. 분명 성현이의 기억에 아로새겨질 시간이 될 것이라 믿으며.















그리고 어젯밤 잠자리에 누운 성현이가 나에게 말했다.


“아빠, 내일 빵빵 타고 한강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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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의 화창하고도 또 낯설기만했던 봄날즈음... '별은 내가슴에'라는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길거리의 잘 꾸미는 남정네들은 너도나도 안재욱마냥, 젤로 앞머리를 내리고 이오리 셔츠를 입고 다니던 그즈음.


난 고민하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 


내앞에, 매트릭스의 네오에게 주어졌던 빨간알약과 파란알약이 놓여있었던 그때... 

故 정운영 교수님의 글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선택을 했다. 


16년이 지난 요즈음.


갑자기 그 글이 너무 그리워졌다. 구글링해서, 이렇게 내 공간에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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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객의 부(賦)

 

 

至賤한 은행 잎에 Kenney G의 색스폰이 '실루에트'를 토하던 날, 후문을 통과한 나는 에르네스트 만델의 '후기 자본주의'를 강의했다. 오래 전에 엘렌이 녹음해준 테입인데, 11월 오후의 처연한 교정에 제법 어울렸다. 삶의 어느 순간에 만나는 이런 稚氣를 아주 근사한 조화라고 생각할 만큼 나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사실 나의 착각 증세는 이런 등속의 방황보다 한층 더 심각하다. 80년대 중반 마르크스주의가 시대의 양심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시절에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딴죽을 걸었고, 90년대 들어와 '티탄의 추락'으로 조소당할 때는 오늘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고 목청을 높였다. 내가 엇대는 그런 부정을 통해서 학생들이 부정의 부정을 배우기를 바랐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사람들은 나의 그런 은밀한 성의를 '냉소적'이란 한마디 말로 단칼에 잘랐고, 그래서 내심 무척 고독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토록 열렬하던 그들이 반대 편으로 돌아섰을 때, 나는 결코 야유하지 않았다.

 

 

 

진보는 보수보다 우월한 가치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진보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아직도 크로마뇽인의 단계에 머물렀을 터이기 때문이다. 보수는 진보의 이익을 관리하는 것이며, 그리고 더 많은 진보가 보수의 이익을 배반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에 대한 공격은 배반당할 이익이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자기 방어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이 보수 대반격이 별로 신기할 것이 없다. '학회평론'에 보내는 나의 관심은 우선 그 진보 지향에 있다. 그것이 질기고 튼튼하지 않다는 따위의 걱정은 잠시 접어두자. 당신들이 몰두했던 진보에의 신앙이 먼 훗날 한낱 허깨비로 판명되더라도, 지금은 그 진보를 수호하는 노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배반의 기록이 낭자하면, 전설의 "You too, Brutus?"는 우리의 영원한 화두이다. 진보든 '학회평론'이든 우리는 당분간 그 부르투스를 신용하는 수 밖에 없다.

 

 

 

혹시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 진리가 이긴다는 미련은 버려야 한다. 시대가 암담할수록 한층 결연한 각오가 필요하다. 일제의 주구들이 명월관 기생의 장고 소리를 들으며 대동아 공영을 뇌까릴 때, 풍찬노숙을 마다 않고 왜경의 총검을 겁내지 않던 독립지사들은 조국 광복에 몸을 바쳤다. 제국주의가 지구를 분할하던 그 암흑 시절 투쟁의 전망으로 말하자면 친일파의 정세 판단이 앞섰을지 모른다. 결국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는 삶의 고비고비에서 싸우느냐 마느냐를 선택하는 것이지, 그 싸움의 결과로서 이기느냐 지느냐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다. 투쟁의 집합으로서 역사의 승부는 중요한 관건이나, 그 투쟁의 모든 국면에 승리를 '보장'하라는 주문은 매우 무모한 요청이다. 앙가주망(engagement)은 흔히 참여로 번역되지만 그 본래 의미는 拘束(구속)이다.

 

 

 

관악에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있지만, 내가 공부한 루뱅에는 아고라 광장이 있었다. 희랍 민주주의를 상징하던 광장은 벌써 이윤이 지배하는 시장으로 변했고, 고뇌와 분노와 함성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아크로폴리스 역시 이방인의 침노에 무너진 옛 성터처럼 피 흘린 용사들의 노래만을 전하고 있다. 그게 어디 아크로뿐이랴. 한때 부흥회를 연상할 만큼 빽빽히 들어찼던 강의실은 이제 썰렁할 정도로 자리가 비고, 캠퍼스의 百家爭鳴을 알리던 대자보의 치열한 언어도 빛을 잃었다. 사물을 대하는 관점과, 그것을 전하는 대화 내용도 예외가 아니다. 잉여가치 이전의 국제적 메카니즘이 '경쟁력 강화'로 설명되고, 자본주의 전일 체체에의 편입은 '세계화'가 대신한다. 그것은 매우 편리한 변신이지만, 문제의 핵심을 호도하기에 위험한 함정이다. 세계화란 생산조건이 상이한 국가에 단일한 교환기준을 적용함으로써 부등가교환을 강화하는 절차이며,국적을 폐지하여 자본의 활동영역을 확대하려는 노력인데, 이것이 시대의 새로운 우상으로 등장했다. 우상에는 공물을 바쳐야 하고, 그 공물은 인간의 노동 이외에 달리 없는데 말이다.

 

 

 

푸른 하늘을 나는 노고지리가 자유롭다는 시인의 노래가 수정될 만큼 혁명은 고독하고, 또 엄격한 것이어야 한다. 사실 우리는 혁명을 너무 희화적으로 대했다. 자신의 힘을 과신하다가 어이 없이 저지른 실패에 진지한 반성 절차를 거치기도 전에, 이번에는 상대의 힘을 과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연히도 '문민'의 구호는 이들의 과거 청산에 기막힌 구실을 제공했다. 근래에 이 사회 일각에서 줄지어 일어난 전향 서약의 작태를 보노라면 마치 변절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문민을 날조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마저 든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혁명을 믿지 않으면서도 혁명을 외친 이유는 그 자리가 다른 어디보다도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라"는 어느 학생의 고백을 아주 귀하게 받아들인다. 남을 위한 혁명이 아닌 자기를 위한 혁명이란 역설이 매우 당돌하게 들리지만, 그러나 아주 정직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혁명이 아닌 퇴각의 시대이며, 이런 퇴각의 테르미토르에는 그처럼 '이기'에서 출발한 자기 검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會者定離의 고색 창연한 인사를 전해야겠다. 학칙 개정으로 13년간 過客노릇을 하던 관악의 강단을 떠나게 되었다. "공황론에서 배운 것은 취직시험에 도움이 안 되고, 고시에 출제되지 않을 뿐더러, 대학원 입학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한 학생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참으로 쓸데없는 강의를 했다는 민망한 마음과, 이런 과목을 가지고 잘도 배겨냈다는 대견한 감정이 함께 몰려왔다. 그 학생은 저항의 에너지로서 정치경제학의 필요를 역설하면서 나를 위로했지만, 사실 대학강의는 다소 쓸모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다짐이다. 쓸모 있는 부분은 자본이 앞장서서 맡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명제는 사회에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대학에서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미구에 지배세력에 편승할 지식인이 한때 과시하는 현학 취미일지라도, 나는 그런 사치의 유효성을 인정한다.

 

 

 

단 몇줄로 끝나는 내 초라한 이력서에 관악의 과객질은 가장 찬란한 기록이 될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는 어느 신문사의 食客 노릇을 했다. 과객이든 식객이든 객은 주인의 고마움에 인사를 치러야 하는데, 황망중에 슬쩍 떠나는 비레를 용서하기 바란다. 그 대신 강의실에서 맺었던 잠시잠시의 인연들을 소중히 간직하겠다. 이제껏 염치없이 남의 상만 받았으니, 나도 어서 내 상을 차려야 한다는 초조감이 앞선다. 사르트르를 '망할 녀석'쯤으로 그려놓은 폴 존슨의 책을 읽으면서, 사르트르의 생애를 점령한 '젊음'과 '좌파' 지향을 몹시 부러워하게 되었다.

 

 

 

Bonne chance a tous!

 

모두에게 행운을!

 

 

 

 

 

1994년 12월 21일

 

 

 

鄭雲暎

 

 

 

출처: 학회평론, 1994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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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어야 할 기억들. 그러나, 너무나 아프고 아픈 일이기에... 쉽사리 감행하지 못했다. 너무나 감정적으로 버거워서, 차일 피일 미루어둔 아픈 글쓰기. 글을 쓰기위해, 그 기억들을 떠올리고 사진들을 바라보는게 너무나 아프고 힘들게만 느껴졌었다.

 

무지개 다리를 건너 별이 된 아이들. 그렇게 별이 되어 다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그 아이들. 우리와 함께 울고, 웃고, 숨쉬었던 나의 친구들... 욘석들을 무의식의 저편, 기억의 서고속에 묻어둘 수 만은 없다.

 

너무 아파, 그 삶과 죽음의 기록들을 꺼내어 풀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니, 아무리 강고한 기억들도 조금씩 휘발되어감을 느낀다. 아이들과 우리가 나누었던 기쁨과 사랑, 그리고 슬픔. 그 찐득한 감정들이 휘발되어, 딱딱한 무기질의 박제로 남아버리기 전에... 다시한번 기억을 떠올리고...또 그러기 위해 기록해야 한다. 블로그에 짤막하게 기록해두고, 비공개로 잠자고 있는 아이들의 기억을 다시 복원해야 할 때가 왔다. 힘들어도...다시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2008.09.01 훈이

2008.10.03 레이

2008.10.26 미래

2008.11.15 주니

 

2011.02.28 옹이

 

2012.03.26 희열

2012.05.02 희망

 

2013.04.08 은돌

2013.06.19 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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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도... 반팔 차림이 부담스러워지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슬픈일 들에 지치고 뜨거운 여름햇살에 힘겨워, 가슴속 한켠으로 파고 들어있던 감성이, 서늘하게 코끝을 스치는 가을바람의 감촉에 다시금 기지개를 켠다.


2012년...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 마냥, 집에서 모시는 냥이님들이 서른 여섯. 바람 잘날 없었다.


지난해 말부터 드리운 복막염의 어두운 그림자. 1월 24일...금동이까뮈가 고양이별로 떠나갔고, 그후로도 이어진 희망이희열이의 투병. 그 이후에도...올 여름내내 계속해서 병원에 드나드는 시간이 지속되고, 그 시간의 무게에 눌려...너무나 기진맥진 지쳐왔다. 물론 슬픔의 기억만 있었던건 아니었다. 네이버 카페에서, 보호 기간이 만료되어 안락사 위기에 닥친 아이를 데려오기도 했고, 길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 그 아이를 데려오기도 했다. 슬픈 이별의 기억과 새 삶을 찾게된 아이들과의 만남의 기억들이 혼재되어, 시간이 흘러갔다. 당장 글로 기록하진 못해도. 늘 사진으로 모든 시간들을 기록하려 했다. 마음이 추스려지면,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써봐야지...하면서.


바람이 분다. 우리 곁에 함께 했고, 또 함께 하고 있는 아이들의 기록은... 더디더라도 계속되어야 할 것 같다. 밀린 숙제 하듯 굵직한 슬픔의 기록들만 써내려가다보니, 일상에서 우리 부부를 웃게 하는, 냥이님들의 모습이 자주 기록되지 못하는게 아쉽지만. 힘들고 되새기기 버거운 아픈 기억들을 먼저 끄집어내서 기록해야 한다. 내가, 우리 부부가 기록하고 기억한다면, 그 아이들은 우리 곁에서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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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블로그에 잠자고 있던,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을 정리해보려 하다가, 가슴이 답답해져옴을 느꼈다. 시간이 흘렀건만, 가슴속에 묻어둔 그 기억들을 끄집어 내는 일은, 여전히 불편한 작업인가보다. 역시나 아픈 기억은 잊혀지는게 아니라, 잠시 가슴속에 묻어두는 것인듯 하다. 그러나 힘들어도 기록해야 한다. 기록하고, 기억한다면 그 아이들은 영원히 살아있는 것일테니... '아이들아. 우리는 너희를 늘 기억하고 있단다.'

가슴이 답답해져옴을 느끼면서, 그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싶어, 하드에 있는 냐옹이 사진을 뒤적거리는데.  얼마 전에 찍은 사진을 보게 되었다. '풋~'하는 웃음을 짓게 만드는 사진들. 그래서 한 번 올려본다. 설마 이게 19금에 걸리진 않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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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이와 찌롱이. 남녀상열지사 아닙니다. 둘다 여자 야옹이들이에요~








본론으로 들어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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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이와 찌롱이(제이) 커플. 행운이가 찌롱이 목덜미를 너무 아프게 물길래, 혼내면서 순간 카메라를  들어서 찍어본 사진이다. 행운이는 오래전에 중성화 수술이 되어있는 아이라. 보면서 풋~ 하면서 사진을 찍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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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념무상~해탈 상태의 행운이 ^^;;;








글을 올리며 보니, 플래쉬 이미지로 만들어주는 기능도 있었다...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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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참 빠르다. 무려...어제그저께가 크리스마스였다니... 어찌되었건, 그날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와이프와 10번째 함께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중에, 두번째 화이트 크리스마스.  2000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당시 여자친구라 불리웠던^^  와이프랑 사귀고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날. 종로쪽으로 버스를 타고 나가고 있었는데 동대문 근처를 지날때즈음, 눈에 펑펑 쏟아졌던 기억이 정말 엊그제 같다. 당시는 디카가 지금처럼 대중화되기전이었고(2002~2003년쯤 부터, 디카가 대중적으로 쓰이기 시작한것 같다. 내가 디카를 처음 구입한 것도 그 즈음이고)  그리하여, 당시 손에 들고 나갔던 똑딱이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그날의 기억들의 유일한 물적 증거가 되고 있다. 싸구려 몇만원짜리 스캐너로 스캔한 작품(?!)이라 사진의 품질이 상당히 열악하지만, 이 한장의 사진 속에 그날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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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다른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했던 것 같다 ^^;;;



   2009년 12월 25일 저녁. 창문을 열어보니, 눈발이 날리는게 아닌가... 감정의 굳은살 저 뒤편에 아직 말랑말랑한 그 무언가가 아직 남아있던 것이었을까... '크리스마스'여서가 아니라,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였기에 잠시 집앞에 홍대 근처로 마실을 나갔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져 걷고 싶었다. 그리고 걸었다. 잠시 피자헛에 들어갔다가... 포인트카드의 혜택없이 피자를 먹는 짓이 왠지 손해 보는 것만 같은 느낌에... 나와서 그져 걸었다. 둘이서 나름 육중한 카메라 손에들고 셀카도 찍고, 2009년 12월 25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들을 눈에 담고 가슴에 담았다.

   눈도 오고, 손도 시리고, 사진찍으러 나온게 아니라 와이프 손잡고 걷기 위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뷰파인더를 보지도 않고, 대충 느낌가는데로 카메라를 조준(!)하고는 셔터를 눌러댔다. 훗날 2009년 12월 25일을 기억케 해줄 습작들. 그 날의 시간들이 얼음땡하고 메모리카드 안에 담겨 나에게 붙들려 와버렸다. 얘들아...그냥 우리랑 함께 지내자.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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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블로그에 있던 글을 2011년 8월 31일 17시 52분에 옮겨놓습니다.
- 글작성 시간은 원본 글의 작성시간에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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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8일 오전, 짱이를 보내주러 가던길, 차창밖으로 내다본 파아란 하늘은 참 슬퍼보였다.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뿌려놓은 씨앗들속에서,
우리의 추억과 기억이 싹트게 되지만,

또한 시간이 흘러가면, 그속에서 싹튼 우리의 추억과 기억은,
움켜쥔 손아귀에서 속절없이 흘러내리는 고운모래의 감촉처럼, 흐릿하게 옅어져간다.

떠나간 존재에 대한 추억의 향기는,
눈물겹게 잡아보려 바둥대도, 언젠가는 희미해져갈 것이라는,
시간의 마법에 대한 예감은, 때론 내 가슴을 쥐어짜게 만들지마는,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삶의 Rule인것을 어찌하겠니...

그러나, 너와 내가 함께 한 시간의 발자취는, 영원히 내가슴에 남아있으리라.

너와 함께한 시간속에서의 웃음.
너와 이별한 후의 눈물.

영원히 내가슴속에 새겨보려, 다시한번 그 시간들을 더듬어본다. Timeless Time...

FOREVER  ZZang











Posted by Hu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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