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6일이면 두 돌이 되는 내 아들 성현이.


아이는 정말 하루가 다르게 커간다. 전날까지만 해도 쓰지 못했던 단어들을 오늘 갑작스레 발음하기 시작한다. 자기 주관 & 자기 고집이 형성되었고, 좋고 싫은 것에 대한 의사표시를 명확히 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큰 상들을 제대로 확립해내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다른’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감정 표현이 풍부해진 지는 오래다. 진정 의미를 가지고 기뻐하며 박장대소 꺄르르 웃기도 하고, 강력크하게 떼쓰는 일도 많아졌다. 특히나 요 며칠 사이에 그 떼쓰기의 강도가 확 올라갔다. 아들 녀석은 자기 고집이 있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아이이다. 좋고 싫은 걸 명확히 표현하는 아이. 이러한 성향의 아이를 부모가 잘 키워낸다면, 그 자기 고집과 자기 주관은 아이의 장점이 되어 아이를 빛나게 해줄 것이고, 아이의 삶을 지켜주는 버팀목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자기 고집과 자기 주관을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무작정 꺾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무작정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키울 수도 없다. 그래서, 고민은 시작된다.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인가?’ 라는 것은 여태까지 다소 추상적인 차원의 고민이었는데, 이제는 굉장히 현실적인 차원의 고민이 되었다. 내가 아이가 심하게 떼쓰는 상황을 목도하고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훈육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너무 거창하게 말했나? 딱 한마디로 쉽게 표현하자면, ‘어떻게 혼내야 할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을 일상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일이 무척이나 잦아졌다. 현재 나는, 나 스스로 이런 상황에의 행동지침이나 메뉴얼 같은 게 확립되어 있지 않기에, 내 행동의 일관성이 담보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이가 느끼기에도, 아버지의 반응이 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좋지 못하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건 간에, 아이가 예측 가능한 ‘아버지’여야 한다. 


요즘 반복되는 상황을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우선 나는 최대한 참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다행히도 아이의 떼쓰기가 나의 인내력의 허용범위 내에서 그친다면, 아이는 좋게좋게 이야기하며 달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떼쓰기가 나의 인내력의 한계를 넘어서거나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라 내 인내력이 급격히 낮아진 상태라면, 아이는 버럭 큰소리로 혼내는 모습의 아버지를 보게 될 것이다. 나도 아버지이기 이전에, 부족하디 부족한 그냥 인간이기에, 내 감정적 상태에 따라 내 반응의 양태가 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나 스스로가 컨트롤되지 못했음을 느낄 때, 너무나 크게 후회하게 된다.


어떠한 포지션을 취할 것인가.  그때그때의 감정에 기대어 아이를 키울수는 없다.  아마도 내 고민의 종착지점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히 규정하는 것일듯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로서 아버지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을 하지 않는 것.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봐야겠다.




목욕하러 들어가기 전 한 컷. 아이의 해맑음 웃음 지켜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Posted by Hu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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