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대상이, 할아버지가 된 지 오래다. 지난해 말, 대략 10월~11월 정도만 해도 수영장 가기 위해서 부모님 댁에 성현이를 맡기고 나오려면,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떼를 쓰곤 했는데, 이제는 부모님 댁에 가서 성현이를 데리고 오려면 반대의 상황이 연출되곤 한다. 얼마 전까지는 할아버지만 좋아하는 듯 보이기도 했는데, 요근래부터는 부쩍 할머니에 대한 애착도 보인다. 하긴 성현이를 제일 많이 챙기시는 게 내 어머니이시기도 하다. 원칙을 철저히 지키시는 어머니의 육아패턴은 나에게 든든한 지원군이자 믿을 수 있는 존재이시다.


예전에는 ‘하지~ 하지’ 하면서 할아버지를 물렀는데, 얼마 전부터는 ‘할아아버지’, ‘할아버지’ 하면서 제대로 된 발음을 한다. 할머니를 부를 때에도 ‘할~ 할~’ 하던 것에서 발전해 ‘할머니’라는 발음을 제법 제대로 해낸다. 1월 후반 즈음부터 보였던 변화 같다. 2015년 10월 처음으로 ‘할~할~’하며 부모님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짧은 기간 사이에 성현이의 언어능력은 천지개벽하듯 발전했다.


성현이가 태어나고, 부모님께서 참 많이 웃으신다. 물론 성현이의 활동량과 떼쓰기 등으로, 성현이 봐주실 때 체력적인 힘듦을 느끼시지만 그래도 성현이로 인해서 정말 많이 웃으신다. 내가 언제 이렇게 나로 인해 부모님을 웃으시게 해드린 적이 있었던가.





나는 성현이의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게 된다. 여전히 나는 나 스스로 만족스러운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 성현이의 할아버지는 내가 봐도 정말 훌륭한 아버지이시다. 역시나 훌륭한 할아버지이시기도 하다. 성현이가 아버지에게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버지가 나이가 들어가시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아버지로서 나의 목표가 있다면, ‘내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대하시는 태도, 배려. 모든 것 하나하나를 놓치지 말고 배워야 한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로 자라왔으므로, 내 안에 내 아버지와 같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씨앗들은 이미 잉태되어 있다고 믿는다. 성현이를 대할 때 조금만 더 기다려주고, 조금만 더 참아주고, 조금만 더 인내하자. 그게 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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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26일이면 두 돌이 되는 내 아들 성현이.


아이는 정말 하루가 다르게 커간다. 전날까지만 해도 쓰지 못했던 단어들을 오늘 갑작스레 발음하기 시작한다. 자기 주관 & 자기 고집이 형성되었고, 좋고 싫은 것에 대한 의사표시를 명확히 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큰 상들을 제대로 확립해내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다른’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감정 표현이 풍부해진 지는 오래다. 진정 의미를 가지고 기뻐하며 박장대소 꺄르르 웃기도 하고, 강력크하게 떼쓰는 일도 많아졌다. 특히나 요 며칠 사이에 그 떼쓰기의 강도가 확 올라갔다. 아들 녀석은 자기 고집이 있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아이이다. 좋고 싫은 걸 명확히 표현하는 아이. 이러한 성향의 아이를 부모가 잘 키워낸다면, 그 자기 고집과 자기 주관은 아이의 장점이 되어 아이를 빛나게 해줄 것이고, 아이의 삶을 지켜주는 버팀목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자기 고집과 자기 주관을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무작정 꺾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무작정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키울 수도 없다. 그래서, 고민은 시작된다.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인가?’ 라는 것은 여태까지 다소 추상적인 차원의 고민이었는데, 이제는 굉장히 현실적인 차원의 고민이 되었다. 내가 아이가 심하게 떼쓰는 상황을 목도하고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훈육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 너무 거창하게 말했나? 딱 한마디로 쉽게 표현하자면, ‘어떻게 혼내야 할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을 일상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일이 무척이나 잦아졌다. 현재 나는, 나 스스로 이런 상황에의 행동지침이나 메뉴얼 같은 게 확립되어 있지 않기에, 내 행동의 일관성이 담보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이가 느끼기에도, 아버지의 반응이 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좋지 못하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건 간에, 아이가 예측 가능한 ‘아버지’여야 한다. 


요즘 반복되는 상황을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우선 나는 최대한 참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다행히도 아이의 떼쓰기가 나의 인내력의 허용범위 내에서 그친다면, 아이는 좋게좋게 이야기하며 달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떼쓰기가 나의 인내력의 한계를 넘어서거나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라 내 인내력이 급격히 낮아진 상태라면, 아이는 버럭 큰소리로 혼내는 모습의 아버지를 보게 될 것이다. 나도 아버지이기 이전에, 부족하디 부족한 그냥 인간이기에, 내 감정적 상태에 따라 내 반응의 양태가 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나 스스로가 컨트롤되지 못했음을 느낄 때, 너무나 크게 후회하게 된다.


어떠한 포지션을 취할 것인가.  그때그때의 감정에 기대어 아이를 키울수는 없다.  아마도 내 고민의 종착지점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히 규정하는 것일듯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로서 아버지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을 하지 않는 것.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봐야겠다.




목욕하러 들어가기 전 한 컷. 아이의 해맑음 웃음 지켜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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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 즈음이었다. 집에 성현이가 가지고 놀만 한 장난감이 너무 없다는 생각에, 성현이 장난감들을 골라보다가 블럭을 사기로 했고 가성비 좋다고 하는 통큰블럭을 주문했다. 처음 주문할 때는 성현이와 함께 블럭을 맞추고 놀 기대에 부풀어있었지. 부푼 가슴을 안고, 롯데마트 서울역점에 가서 직접 블럭을 픽업해왔다. 후다닥 사진 찍고 블럭을 펼쳐서 놀려고 하니, 내가 상상했던 것과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성현이는 블럭을 맞추기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 주로 집어 던지기, 거기에 내가 모양을 조립해주면 우악스럽게 해체하기 놀이.  뭐랄까, 블럭이 본연의 용도로 사용될 날은 요원해 보였다. 아, 그날은 언제 온단 말인가.


그!런!데!


아이의 변화는 순식간이다.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성현이가 지그시 앉아서, 블럭을 조립하고 놀고 있다. 불과 며칠 전까지는 크게 블럭에 크게 관심을 둬 주지 않던 아이가, 갑자기 집중해서 블럭을 맞추고 있다. 아이가 또 한 단계 성장했구나. 업그레이드(?) 된 성현이를 보면, 건담프라모델을 가지고 놀 날도 아주 멀지 많은 않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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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다 보면, 참을 인(忍) 글자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들 한다. 참아야지. 화내지 말아야지. 늘 생각하지만, 그러한 나의 결심은 길게 이어지지 못할 때가 많다.


뒤집지도 못하고 누워서, 배고프면 빼에에 울고 눈만 껌뻑이던 신생아 시절을 지나, 이제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자기 고집도 제법 생긴 22개월짜리 아들. 요 녀석과 조금 부대끼다 보면, 내 인격의 바닥을 본다. 아… 이 부족하디 부족한 아버지여. 그대의 아버지는 진정 어른스러운 아버지이셨건만 그대는 왜 그러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이를 키우고 아버지로서 역할 하면서, 내 아버지가 진정 성인군자셨다는 것을 느낀다. 


늘 반성하고 경계하자. 나의 편의를 위해서 아이의 행동을 통제하면서, 그것이 여의치 않았을 때 가장 쉬운 선택을 해오지는 않았는지? 또 아이를 혼낼 때 그것이 긍정적인 훈육이 아닌 스스로 감정을 제대로 제어 해내지 못한 ‘못난 화풀이’ 수준의 것은 아니었는지. 


아이는 순백의 도화지를 가지고 태어난다. 훗날에는 아이 스스로 그 도화지 위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나가겠지만, 지금 이렇게 어린 영유아 혹은 어린이 시기에는, 부모의 행동과 역할이 그 도화지에 자국을 남기게 마련이다. 내 아버지로서의 역할이란 그 도화지에 멋들어진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도화지에 나쁜 얼룩이 묻지 않도록 그래서 아이가 그 위에 마음껏 자신의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도록 보호해주는 것일진대, 내가 내 인격의 미성숙함으로 내 아이의 도화지에 얼룩을 남길 수는 없지 않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나의 분신. 내 아들 성현이. 사실 나도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내가 이토록 아이를 좋아할 줄은 몰랐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나도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아이가 태어나고 이제 2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참 많은 게 바뀌었지. 아이가 태어나고 커가면서, 나 또한 점점 아버지가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아이가 10대 시절에도 또 그 이후에도 대화의 상대로 남을 수 있는 아버지 되기. 그게 아버지로서 나의 목표인데, 그러려면. 요즘 들어 자주자주 마주하게 되는 내 인격의 바닥을 좀 멀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성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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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26일. 나는 아버지가 되었다. 성현이와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의 느낌을 여전히 기억한다.


약간의 피로감이 뒤섞인 채 바라보았던 그 분만실의 어두운 조명과 잔잔한 클래식의 선율. 우리 부부가 이전에 미리 선택했던 출산의 조건들이었다. 단 한 가지가 달랐다. 우리가 선택했던 건, 내가 출산의 전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은 채, 출산이후 탯줄을 자르는 것이었다.진통이 오고, 양수가 터지고 얼떨결에 분만실로 아내의 손을 붙잡고 들어갔고, 출산의 전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얼떨떨한 그 느낌. 어색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랬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내가 부르는 이름이었지, 내가 불리는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임신을 지켜보면서, 내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것을 머리로 인식해가긴 했지만, 가슴으로 느끼진 못했던 것 같다. 어찌 되었던 나는 아버지가 되었고, 21개월 가까운 시간이 흘러갔다. 그 시간 속에서 이름만 아버지였던 나는, 조금씩 아버지가 되어갔다.


누구나 처음 부모가 되어보고, 처음 아이를 키워본다. 미리 상상해보고 책을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은 글로 배워지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닌듯하다. 대부분 처음 마주하게 되는 상황들. 그 속에서의 선택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부모가 되어간다.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리고 나의 철학이 아이 앞에서 갈지자처럼 갈팡질팡 우왕좌왕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여기에 내가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들을 기록하고자 한다. 육아 일기 일수도 있고, 그냥 푸념 어린 끄적임일수도 있다. 정확히 무언가를 정하고 시작하는 건 아니다. 기록이 기억을 이끌어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기록해야 한다.



우선, 돌잔치 때의 성장 동영상이나 2013~2014년 1년간의 기록으로 모아놓은 사진 업로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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